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3개월쯤 지난 2017년 8월 초순. 청와대 인사수석실은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에 산악 시인 권경엽 씨가 청와대 추천으로 정해졌으니 모든 지원을 해줄 것을 환경부에 지시한다. 환경부 공무원들은 대외 비공개 업무 자료를 건네고 권 씨로부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직무계획서를 미리 받았지만 그가 제출한 자료로는 도무지 1차 서류 심사조차 통과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환경부 실무진은 경력을 보완해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자기소개서와 직무계획서를 대신 써주게 된다. 한 달 뒤 16명이 지원한 이사장 공모에서 권 씨는 임원추천위원회 서류 심사에서 2등으로 통과한다. 그는 2차 면접에 앞서 예상 질문·답변서를 미리 받았고 결국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운영위원회 의결과 환경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국립공원 관리를 총괄하는 수장 자리를 꿰찬다. 권 씨는 2017년 대선 직전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문학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지난달 9일 서울지방법원이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해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판결문 내용의 일부다. 함께 기소된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자행된 공공기관 인사 농단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불과 3개월 전 문 대통령이 취임사를 통해 밝힌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은 그들만의 균등과 공정·정의였던 것이다. 법률에 명시된 기관장과 감사·이사의 임기 보장은 한낱 ‘장식 규범’에 불과했고 임추위와 공운위는 ‘핫바지’로 전락했다. 그 결과 영문도 모른 채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공모에 나선 130여 명의 후보자들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 당시 청와대와 환경부는 박근혜 정부 출신 인사 15명 가운데 13명을 찍어내고 그 자리에 낙하산을 꽂아 넣었다. 함량 미달의 낙하산을 연착륙시킨 환경부 인사 실무진은 ‘범죄 집단’에 내몰려 직권남용과 업무방해로 교도소 담벼락을 넘나들었다.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는 역대 어느 정부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고질적 병폐다. 이명박(MB)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가 대놓고 ‘전(前) 정권 인사는 자진 사퇴’하라고 공개적 압박을 가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낙하산 인사는 새 정부에서는 없을 것”이라며 단호한 개혁 의지를 보였지만 낙하산 투하는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불거진 강원랜드 채용 비리 사건을 계기로 2017년 11월 범정부 차원의 전수조사에 착수한 바로 그 순간에도 이른바 ‘캠코더(대선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출신)’ 인사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냈다. MB 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는 “대통령의 인사권도 적법한 절차와 기회균등 원칙에 따라 행사해야 한다”며 “문 대통령은 관행이라는 이유로 위법과 탈법을 묵인 내지 방조했다”고 비판했다. 이 변호사는 법제처장 시절 MB 정부의 전 정권 출신자 퇴진 압박에 대해 공개적으로 “일괄 사표 종용은 위법”이라는 취지로 언급해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만든 장본인이다.
낙하산 파티가 계속되는 까닭은 정치권이 공공기관 임원 자리를 정권 창출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 시절에는 낙하산 인사가 방만 경영을 초래한다며 비판하다가 집권 세력이 되면 180도로 달라지는 연유다. 공공기관이 지방 이전 이후 지역사회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점은 정치권력으로서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역시 강력한 무기는 돈이다. 360개 공공기관의 전체 예산은 2019년 690조 원으로 당시 정부 예산 496조 원의 1.4배에 이르렀다. 공공기관의 지역 일자리 창출과 지역사회 공헌 활동 등은 득표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정치권력은 표면적으로는 대통령과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를 발탁해 정책 집행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외부 수혈을 통한 내부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염불은 관심 밖이고 잿밥에만 눈독 들였다. 지금껏 공공기관이 ‘철밥통’이니, ‘신의 직장’이니 하는 비아냥 대상에 오른 연유는 여기에 있다.
낙하산 관행은 공무원 통제·보상 수단이기도 하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판결을 보면 공공기관 임원 자리를 짬짜미하듯 청와대 몫과 환경부 몫으로 나눴다. 환경부 관계자들은 청와대 하명을 받아 낙하산 연착륙을 돕고 자신의 자리를 챙겼다. 중앙 부처는 인사 적체를 해소할 수 있고 집권 세력은 ‘궂은 일’을 알아서 해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다. 정치권력과 공직 사회의 암묵적 낙하산 카르텔이 고착화한 것이다.
낙하산 인사 폭주는 공공기관 부실과 방만 경영의 독버섯이 자라나는 온상이라는 점에서 공공 부문 개혁의 역주행이나 다름없다. 전문성과 능력이 없는 함량 미달의 공공기관장은 자신의 약점을 파고 드는 노동조합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방만한 경영을 초래했다. 그나마 박근혜 정부 당시 4대 개혁 과제 중 하나로 공공 개혁을 선정하고 부채 감축과 방만 경영 근절에 나섰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표 떨어질까봐 아예 눈을 감고 있다. 대신 ‘공공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한 게 공공성 강화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대표적이다. 전 정부 때 도입한 성과연봉제는 거의 대부분 폐지됐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을 지낸 옥동석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낙하산 인사의 폐단은 공공기관의 정치화에 있다”며 “무리한 정책 수행을 뒷받침하려다 공공기관이 망가지면 결국에는 국민 피해로 되돌아온다”고 지적했다. 옥 교수는 “공공기관은 정부의 비효율성을 보완하기 위해 민간의 자율성과 시장 기능을 가미한 공적 조직”이라며 “현 정부가 내세운 공공성은 효율성·경제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무리한 정책을 뒷받침하다 공공기관이 빚더미에 오른 사례는 차고 넘친다. 4대강 사업에 동원된 수자원공사와 해외 자원 개발에 나선 에너지 공기업의 부실화가 대표적이다. 낙하산 인사 근절은 공공기관 개혁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대통령의 인사권을 100% 인정하자는 ‘엽관제’ 도입과 임기의 일치, 임추위·공운위 회의록 공개, 인사 비리의 처벌 규정 마련 등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낙하산 방지법’을 만든다고 해도 정치권력의 바른 인사권 행사가 없으면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공공기관장 인선은 주무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여서 마치 대통령은 낙하산 인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포장되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꼬집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판결은 복잡한 먹이사슬로 얽혀 있는 낙하산 난맥을 단칼에 끊어냈다. 함부로 낙하산 인사를 밀어붙이면 감옥행이라고 경종을 울린 판결은 다양한 제도 개선보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다. 정권 말 낙하산 ‘알박기’ 꿍꿍이를 꾸미는 문재인 정권 인사들은 276쪽에 이르는 법원 판결문(사건 번호 2019고합350)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