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트래블 버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페스트가 창궐하자 방역 차원의 ‘위생 통행증’ 의무화가 시행됐다. 본인의 건강 상태 및 감염원과의 접촉 여부를 표시한 통행증을 소지해야 지역 간 이동이 가능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17세기에는 선박들도 선원들의 건강 상태가 담긴 통행증을 제시해야 여러 항구를 드나들 수 있었다. 건강·의심·질병 등 세 가지로 구분된 통행증에 따라 검역 절차도 다르게 적용됐다고 한다. 페스트를 옮길 염려가 없다는 위생 통행증이 여행자의 필수품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이 주춤해지자 관광 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트래블 버블(Travel Bubble)’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상대방 국가가 방역이 우수한 안전 지대(버블)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출입 제한을 풀고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자는 취지다. 해외에서는 ‘관광 다리’ ‘코로나 통로’로도 표현되며 우리는 ‘비격리 여행권역’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지난해 5월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은 세계 최초로 트래블 버블 협약을 체결하고 격리 기간 없이 자유로운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호주는 지난해 10월부터 뉴질랜드인들의 호주 북부 노던 테리토리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대만도 양국 여행객들이 음성 판정을 받으면 추가 격리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는 대만 정부는 자국의 방역 모델을 중심으로 트래블 버블을 형성하는 ‘국제여유연맹(國際旅遊聯盟)’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확진자, 검역 역량 등 네 가지 기준에 맞춰 국경을 개방하자는 것이다. 백신 접종률 1위인 이스라엘은 디지털 그린패스를 만들어 다중 이용 시설 출입을 허용하며 유럽연합(EU)도 디지털 백신 여권 도입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2일 관광업을 살리겠다며 세계 주요국들과 트래블 버블 협약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내외 코로나19 감소세 및 백신 보급 상황 등을 고려해 협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하지만 관광 재개에 앞서 중요한 것은 철저한 방역일 것이다. 우리도 백신을 안전하면서도 속도 있게 접종해 하루빨리 ‘코로나19 청정국’ 대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때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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