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영화·공연·여행 등의 분야와 달리 방송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순조롭게 굴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콘텐츠를 꾸준히 공급하는 것과는 별개로 해외 촬영이 불가능해지고 새로운 시도도 적어졌다. 방송가는 투자 규모를 줄이고 사업을 축소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와중에 새로운 방송 채널을 론칭하며 앞으로 3년간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총 5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나선 곳이 있다. 미국의 글로벌미디어 기업 디스커버리의 한국 지사인 디스커버리채널코리아다. 지난해 9월 콘텐츠 제작사 ‘스튜디오디스커버리’와 함께 출범한 디스커버리채널코리아는 JTBC와 공동 제작한 ‘싱어게인?무명가수전’, KBS와 함께 만든 ‘땅만빌리지’ 등 눈에 띄는 프로그램들을 내놓으며 방송 시장에 안착하는 모습이다. 채널 경쟁력 면에서도 타깃 시청자 기준으로 월평균 시청률이 론칭 당시 전체 260개 채널 중 170위 수준에서 지난달 말에는 68위까지 올라갔다.
정일훈 대표이사는 최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죽다 살아났다’ 생각하고, 직원들이 너무나 잘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돌아봤다. “지난해 사업 경과를 디스커버리 아태 지역 본사에 보고했더니 ‘남들은 있던 회사도 문을 닫는 코로나 시대에 론칭해서 1년의 과업을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면 가장 큰 칭찬이었던 것 같아요.”
정 대표가 디스커버리에 정식 합류한 것은 한국 법인이 출범한 지난해 초였다. 한국 재진출을 모색하던 디스커버리 측의 전략 수립을 위한 몇 가지 자문에 응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아나운서에서 시작해 게임캐스터, 방송 콘텐츠 수출 등 방송계에서 30년간 일하며 배운 것들을 동원하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개인적으로는 무조건 플러스가 될 것으로 봤다”고 합류한 계기를 설명했다.
디스커버리채널코리아와 정 대표가 지향하는 방향성은 ‘한국형 팩추얼’ 콘텐츠에 맞춰져 있다. 글로벌 디스커버리 채널이 다큐멘터리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사이에서 정체성을 잡았다면 한국에서는 예능과 리얼 버라이어티 사이에 위치한 콘텐츠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각종 다큐멘터리 중심의 미국 디스커버리채널과 달리 한국 시청자들의 선호에 맞춰 무게중심을 예능 프로그램 쪽으로 좀 더 옮긴 셈이다. 정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유럽 등지에서 많은 팬을 보유한 디스커버리채널의 시청자는 70%가 남성에 편중된 반면 한국에서는 시청 총량의 70%가 여성이다. 똑같은 노선으로 편성할 경우 국내에서 의미 있는 채널과 콘텐츠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 대표는 “한국 시청자들의 입맛에 따라 현지화한 콘텐츠로 정착한 후 디스커버리의 철학에 맞춘 콘텐츠를 큐레이션하고자 했다”며 “디스커버리채널 모회사가 유로스포츠·모터트렌드·TLC 등 19개 채널을 더 갖고 있는데 이들의 정체성을 모두 가져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비전을 본사에서는 어떻게 봤을까. 그는 “기존 디스커버리채널의 방향성과 달랐기 때문에 설득에만 석 달 넘게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 한국 작품의 넷플릭스 내 인기 상승 등을 거치면서 그의 주장은 내부에서도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태 지역 본사도, 글로벌 본사도 긍정적이다. 정 대표는 디스커버리가 진출한 아시아 30개국에 공급하기 위해 현지화한 뒤 라이브러리에 올려놓은 한국 콘텐츠가 내부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며 음원 저작권 등의 문제가 해결되면 이르면 이달부터 아시아 지역에 송출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디스커버리가 한국에 재진출하며 만든 스튜디오디스커버리는 아태 지역에서 유일하게 디스커버리의 이름을 단 콘텐츠 제작사다. 제작총괄을 맡은 정순영 전 SBS 예능국장을 비롯해 중견 PD도 다수 영입했다. 정 대표는 콘텐츠 측면에서 한국을 디스커버리의 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공장’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디스커버리채널코리아 대표를 뽑는 면접장에서 “한국 미디어·콘텐츠 시장에서 돈을 벌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한국에서 콘텐츠를 만들어 아시아 전역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며 “디스커버리 계열 채널이 송출되는 곳 중 아시아에서 통할 만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곳은 한국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서 채널 론칭 기자 간담회에서도 “한국 시청자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수준이 높기 때문에 여기서 성과를 내면 전 세계 시청자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고 봤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목표로 내걸었던 5개 콘텐츠 제작을 성공적으로 해낸 디스커버리채널코리아는 올해 10개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새롭게 선보일 계획이다. 올해도 목표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 대표는 “일주일에 방영되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100개 안팎”이라며 “PD 한 명이 은퇴할 때까지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 수가 몇 개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해 정말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분들을 모셔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당부는 잊지 않는다. 가치 있는 제품을 만들면 돈이 자연스레 따라오듯이 가치와 의미가 있는 콘텐츠를 생산해야 시청자들이 ‘시청할 이유’를 발견하면서 시청률이 받쳐준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믿음이다.
그는 “연령대를 막론하고 마음속에 숨은 ‘열정’이 있는 사람이 우리의 타깃 시청층”이라고 강조했다. “디스커버리그룹의 모토가 ‘파워(Power), 사람(People), 열정(Passion)인데 처음에는 열정의 의미를 몰랐어요. 알고 보니 디스커버리라는 단어의 철학이 ‘뭔가를 열심히 탐구하고 시도하다 보면 발견하는 것’이었어요. 디스커버리가 발견이라면 열정은 그 연료겠죠. 10대부터 80대, 아니 그 이상이라도 열정이 남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열정을 마음속에서 발견하려는 사람을 타깃으로 삼고자 합니다.”
He is…
△1969년 서울 △고려대 서어서문학 학사 △ITV·동아TV 아나운서 △온게임넷 게임캐스터 △㈜자유와도전(Freechal.com) 이사 △중국 전중화체육총회 e스포츠 부문 고문 △CJ미디어 e스포츠부문장 및 ㈜월드이스포츠게임즈 대표이사 △중앙엔터테인먼트앤드스포츠 e미디어팀장 △JTBC콘텐트허브 콘텐트사업팀장·엔터테인먼트사업팀장 △현 디스커버리채널코리아 대표이사
/박준호 기자 violato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