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어느 날, 카자흐스탄 국적을 지닌 한인 교포 이 모(40) 씨는 경찰에 제보를 했다. 자신의 집 근처에 사는 한인 교포들이 마약을 거래한다는 내용이었다.
제보를 받은 경찰은 러시아어 통역인을 통해 이 씨에게 ‘제보 진술만 가지고는 명확하게 조사할 수 없으니 가능하면 사진 등 증거자료를 확보해 보내달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이 씨는 통역인을 통해 ‘오늘 그쪽(거래 장소)에 잠입해 그 약물을 구입해보도록 하겠다’는 답을 경찰에 전달했다.
이후 이 씨는 자신의 집에서 마약 판매자 A씨를 만났다. 이 씨는 A씨에게 현금 5만 원을 건넸고, A씨는 마약의 한 종류인 ‘스파이스’를 이 씨에게 건네줬다. 스파이스를 구매한 이 씨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스파이스의 사진을 찍었다.
이 씨는 통역인을 통해 그 사진을 경찰에게 보냈고, A씨로부터 산 스파이스를 화장실 변기에 넣은 뒤 물을 내려 폐기했다.
이후 이 씨는 통역인과 함께 경찰에 출석해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한인 교포들의 마약 거래 실태를 진술했다. 경찰은 이 씨의 진술과 사진 등을 토대로 마약사범 8명을 구속해 검찰에 송치했다.
그 뒤 이 씨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향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그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인천지법 형사15부(표극창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 이 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지시나 위임을 받지 않고 스파이스 매매 행위에 나아간 이상 이 씨에게 스파이스 매매 범행의 범의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1심 판결은 최근 항소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5부(윤강열 부장판사)는 전날 “이 씨는 통역인을 통해 경찰의 요청을 전달받고 마약 범행의 증거를 확보해 수사기관에 제출하기 위해 소량의 스파이스를 매수하고 사진 촬영한 다음 이를 바로 폐기했다”며 “이 씨에게 마약류 매매에 관한 고의가 인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이 씨가 경찰에서 한) 진술은 구체적인데다가 이 씨의 휴대전화에 담당 경찰관의 휴대전화 번호가 저장돼 있는 점 등을 보면 마약 거래 증거 확보를 위해 스파이스를 매수했다는 이 씨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아울러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단과 달리 “이 씨로서는 수사기관의 위임과 지시를 받아 스파이스를 매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씨가 통역인을 통해 경찰로부터 마약 거래 증거자료 확보를 요청받았다는 것이다.
/이희조 기자 lov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