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수칼럼] 전략적 모호성의 굴레

■서울경제 논설고문·백상경제연구원장
남중국해 군사기지화·동북공정 등
덩치커진 中 동북아 최대위협요인
‘쿼드 플러스’ 참여 머뭇거리면
안보·경제적 위험만 가중시킬 뿐

오철수 백상경제연구원장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 지난 2017년 4월 7일 미국을 방문 중이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했던 말이다. 북한 핵 문제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북핵 해결에 대해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 트럼프 대통령의 주문에 중국이 할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천 년간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한반도를 다루기가 만만찮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시진핑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봤다. 이는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언젠가는 한반도를 중국의 그늘 아래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동북공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억지를 부리는가 하면 김치도 중국 음식이라고 생떼를 쓰고 있다. 마치 한민족을 자신들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보는 듯하다.


최근 들어 한반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는 것은 중국의 덩치가 커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2020년 현재 중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4조 7,300억 달러로 미국의 70%를 넘어섰다. 내부적으로는 탈빈곤 사업의 승리를 선언한 상태다. 대부분의 국민이 풍족한 이른바 ‘샤오캉(小康) 사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제 중국은 내부에서 축적한 에너지를 밖으로 돌리고 있다. 30여 년 전 덩샤오핑이 내린 외교 지침인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버리고 ‘주동작위(主動作爲)’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발톱을 숨기고 조용히 힘을 기르는 데서 벗어나 국제 무대에서 할 일을 주도적으로 해나가겠다는 뜻이다. 시진핑은 “태평양은 미국과 중국이 나눠 써도 충분히 넓다”며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같은 중국의 패권 도전은 필연적으로 주변국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미 중국 전투기들은 우리의 방공식별구역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들락거리고 있다. 자신들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까지 사정권으로 하는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놓고 있으면서 우리가 북한 핵 대응을 위해 배치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에 대해서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철거 압박을 가하고 있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는 또 어떤가. 중국은 동중국해에서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방공식별구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가 하면 남중국해에서는 비행장을 갖춘 인공섬을 건설하고 조기경보기까지 배치해놓고 있다. 남중국해는 우리가 중동에서 원유를 수송할 때도, 유럽으로 수출품을 보낼 때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에너지 안보와 무역의 혈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이곳을 차단하면 동북아시아의 경제 숨통은 끊어진다. 미국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실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가 넋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국들과 공조 강화에 나서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중국의 눈치만 보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른바 전략적 모호성이다.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만 해도 그렇다. 미국은 한국·베트남·뉴질랜드에도 쿼드 참가를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중국을 의식해 머뭇거리고 있다. 앞으로 중국의 힘이 지금보다 더 세지면 남중국해 차단을 무기로 우리를 겁박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대처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서든 미국·일본 등 주변국들과 협력을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쿼드 플러스 제안에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미중 패권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여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가 지난 70여 년간 쌓아 올린 자유와 번영의 공든 탑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이제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위험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타조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분명한 외교·안보 원칙을 세워 당당하게 대응해나가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은 위험만 가중시킬 뿐이다.


/오철수 cso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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