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보다 '사람'…이준익 畵風의 수묵화, 스크린 위에 펼쳐지다

정약전 삶 다룬 영화 '자산어보' 31일 개봉
흑산도 유배, 민중과 소통, 시대정신 조명
흑백 영상미 '동주'보다 더 깊고 역동적
"현란한 컬러 배제하면 본질 뚜렷해져"
설경구·변요한 등 명연기로 흡인력 UP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정약전 역을 맡은 배우 설경구./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가 나란히 학식과 품성이 뛰어났다. 임금도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그들을 외면했다. 새 지식과 서양 종교에 눈 뜬 이가 많다는 이유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형제는 목숨은 구했으나 땅끝 귀양을 명 받았다. 동생 정약용이 가야 할 강진은 한양에서 멀지언정 그래도 뭍이건만 형 정약전은 바다를 건너야 해다. 목선을 타고 장장 열흘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 가던 길에 물에 빠져 죽더라도 그게 바로 형벌이라 할, 망망대해 한 가운데 있는 섬. 하지만 정약전이 절망 끝에 발 디딘 그 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니, 진짜 조선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학자의 눈을 다시 반짝이게 할 신기한 생명의 숨결도 가득했다.


조선 순조 때 신유박해로 대역 죄인이 되어 흑산도로 유배됐던 정약전의 삶을 통해 민중의 애환과 시대 정신을 조명한 영화 ‘자산어보’가 오는 31일 개봉한다. 감독은 이준익이다. 전작 ‘왕의 남자’나 ‘사도’, ‘박열’, ‘동주’ 등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는 ‘사건’이 아닌 ‘사람’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아픈 역사의 한 지점을 들여다 본다.


왜 정약전일까. 이 감독은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동학을 공부하던 중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다가 정약용 집안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감독은 “정약용과 목민심서는 ‘다산학’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이미 많이 알려진 데다 영화로 담기엔 내용이 방대하다”며 “반면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그에 비해 덜 조명된 데다 목민심서와는 다른 그 시절 세계관을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정약전을 통해 정약용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정약전이 시대와 불화를 겪었던 인물이라는 점도 이 감독의 마음을 잡았다. 이 감독은 “사극을 찍으면서 역사의 근대성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가 늘 고민한다”며 “시대와 불화를 겪었던 개인을 하나씩 찾아내다 보면 개인을 통해 집단이 갖고 있는 근대성의 씨앗이 어느 순간 크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정약전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지만, 정약전의 섬 생활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집필한 ‘손암 정약전 시문집’에 따르면 영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흑산도 남성 인구가 361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글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제자는 커녕 소통할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글 아는 몇몇이 정약전에게는 몹시 귀한 벗이었다.


이 감독은 정약전이 어울렸던 사람 중에서 창대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창대는 자산어보에도 일부 기록돼 있는 실존 인물이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 일대의 수산 자원을 낱낱이 기록한 책으로, 물고기와 섬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던 창대가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정약전은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창대는 이 감독에게도 중요한 인물이다. 정약전은 영화적 창작으로 풀어내기 조심스러운 반면 기록이 거의 없는 어부 창대에게는 영화적 상상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등 연기력으로는 흠 잡을 수 없는 배우들이 각각 정약전과 어부 창대, 가거댁을 맡아 또 한 편의 뛰어난 사극 영화를 만들어냈다. 동방우, 정진영, 김의성, 방은진, 류승룡, 조우진, 최원영, 윤경호, 조승연 등 쟁쟁한 우정 출연진도 이 감독의 영화 속 세계를 구현하는데 기꺼이 동참했다.



영호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사진제공=중앙메가박스플러스엠

힘든 삶을 산 인물을 정면으로 다루지만 영화는 고혹적이다. 인간의 고통과 상관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하늘과 바다와 섬이라는 자연의 무심한 아름다움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이 감독은 ‘동주’에 이어 ‘자산어보’를 통해 다시 한번 흑백 영화의 아름다움을 스크린 위에 우아하게 구현해 냈다. ‘동주’ 때보다 더 깊어지고 역동적인 흑백이다. 마치 한 폭의 꿈틀거리는 조선의 수묵화 같다. “현란한 컬러를 배제하면 물체나 인물이 갖는 본질적 형태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는 게 이 감독이 흑백 영화에 다시 도전한 이유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26분.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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