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금융]준비 안 된 금소법의 역설…은행, 혁신서비스 속속 중단

[25일 시행…'졸속' 후폭풍 우려]
모든 금융상품에 6대 규제 적용
감독규정 5일전 발표·세칙도 없어
업계 "시범 케이스 될라" 몸사려
피해 고스란히 소비자 몫 될수도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금융권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시스템에 변화된 내용을 반영하려면 최소 한 달은 필요한데 금융 당국이 시행을 불과 5영업일 앞두고 감독 규정을 발표한 데다 시행세칙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국은 금융권의 준비 부족을 고려해 6개월간 시행 유예기간을 둔다고 했지만 업계에서는 ‘시범 케이스’ 우려에 몸을 한껏 움츠려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소비자들을 위한 법이라지만 준비 미진으로 되레 소비자가 불편함을 겪는 ‘금소법의 역설’인 셈이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스마트텔러머신(STM)에서 입출금 통장을 개설하는 서비스를 25일부터 4월 말까지 한시 중단한다고 이날 공지했다. STM은 은행 창구를 찾지 않아도 신분증 스캔 등을 통해 통장을 발급받고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있는 지능형 현금자동입출금기(ATM)다. 지금까지는 약관이나 상품 설명서를 보여주고 넘어갔지만 금소법이 시행되면 상품 설명서를 고객에게 직접 줘야 한다. 하지만 수십 쪽 짜리 설명서를 직접 교부하기는 어려워 e메일로 전달하기 위해 시스템 업그레이드 차원에서 일시 중단을 결정했다.


하나은행도 인공지능(AI) 로보 어드바이저인 ‘하이로보’ 신규 거래를 25일부터 5월 9일까지 한시 중단한다고 공지했다. 하나은행은 “금소법 시행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아 한 번에 전산을 변경하는 게 어려워 하이로보 일반펀드 및 개인연금펀드 신규·리밸런싱·진단거래가 일시 중단된다”고 밝혔다. 다만 이미 고객이 보유한 하이로보 펀드 조회 및 추가 입금, 개별 환매는 가능하다.


금소법은 일부 금융 상품에만 적용하던 ‘6대 판매 규제(적합성·적정성 원칙, 설명 의무, 불공정영업행위·부당권유행위·허위과장광고 금지)’를 모든 금융 상품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위반한 금융사는 관련 수입의 최대 50%까지 ‘징벌적 과징금’을 맞으며 판매 직원에게도 최대 1억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소비자는 ‘청약철회권’ ‘위법계약해지권’을 행사할 수 있고 불완전 판매의 입증 책임도 소비자에서 금융사로 전환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 감독 특성상 가장 중요한 것이 시행세칙에 담기는데 그 내용은 아직 발표도 안 됐다”며 “지금까지 나온 시행령, 감독 규정, 당국의 질의응답 자료에도 여전히 의문점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금소법 통과 후 1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금융 상품 창구 판매보다는 비대면 거래로 유도하고 투자 설명서도 다 출력해서 전달하는 등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카드 업계의 한 관계자도 “감독 규정이 바뀌면 전산·영업 등의 시스템을 바꾸는 데 아무리 빨라야 한 달은 걸린다”며 “그야말로 공황 상태”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금융 당국은 “조만간 시행세칙이 나올 것”이라며 “다만 업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세부 내용들은 시행세칙에 담기지 않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혼란이 큰 것은 펀드를 모아 투자하는 포트폴리오 투자다. 현재 고객이 포트폴리오 단위로 투자를 할 때 금융사는 투자 전략, 위험도, 상품별 투자 비중을 포트폴리오 단위로 설명한다. 하지만 금소법 시행으로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모든 개별 펀드의 투자 전략, 수수료, 환매 기간, 위험도 등을 다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애매한 상황이다. 금융권은 만약 개별 펀드 정보를 다 설명해야 한다면 절차가 너무 많아져 완화하거나 생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금소법에서 규정하는 소액 분쟁에 대한 기준도 불명확하다고 지적한다. 금소법 42조에는 2,000만 원 이하 소액 분쟁 사건은 금융 당국의 조정안이 나올 때까지 금융회사의 소송 제기를 금지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때 적용되는 분쟁 사건이 고객이 금융회사에 제기하는 민원을 기준으로 하는지,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인지 모호하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2,000만 원의 금액 역시 소비자가 청구한 금액인지, 금융사가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인지 불분명하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 규정은 고객과 보험금 지급을 놓고 분쟁이 많은 보험사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 중 하나”라며 “보험사 입장에서는 단순 민원을 기준으로 할 경우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은행에서 10만 원짜리 펀드나 1억 원짜리 펀드나 모두 같은 설명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도 과잉 규제라는 게 은행권의 입장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액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수준의 설명 의무를 이행해야 해 은행 입장에서는 업무 효율이 크게 떨어진다”고 우려했다. 투자설명서를 서면으로 줘야 하는 것도 문제다. 금융권 관계자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라고 해서 모두 종이를 줄여가고 있는데 금소법에 따라 수십 쪽에 달하는 투자설명서를 모두 뽑아서 교부해야 해 ESG 경영에 역행할 것으로 보인다”며 “물론 당국은 e메일 등으로 배포해도 된다고 하지만 혹시나 문제가 될 경우 후폭풍이 크기 때문에 초기에는 서면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많은 영업처에서 태블릿PC를 구비하고 상품 계약 시 태블릿PC상으로 서명을 받았는데 금소법 시행으로 다시 서면 계약으로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혼란이 커지자 당국은 업계에 민원 사항을 외부에 말하지 말고 직접 상의하자며 ‘함구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또 업권별 간담회를 줄줄이 개최할 예정이다. 하지만 금융사들은 구체적인 사례가 나와 업무 형태에 대한 가닥이 잡힐 때까지 몸을 움츠릴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가 은행 등 금융사에서 금융 상품을 가입하는 데 차질을 빚는 등 투자 상품 판매 ‘암흑기’가 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도 “창구에서 상품을 판매하기보다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비대면 거래로 당분간 고객을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며 “고령층의 금융 투자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금소법이 오히려 고령층이 소외받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태규 기자 classic@sedaily.com, 김지영 기자 jikim@sedaily.com, 빈난새 기자 bint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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