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그리던 ‘물방울’을 등 뒤에 두고 앉은 화가 김창열(1929~2021)이 상념에 빠져 있다. 캔버스 위로 올망졸망 맺힌 물방울 그림과 필통 속을 빽빽하게 채운 붓들이 치열한 화가의 삶을 얘기한다. 말 수 적고 부드러운 인품을 지닌 화가의 성정이 인물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아틀리에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바탕 긋기 작업을 끝낸 후 한숨 돌리는 시간인 모양이다. 화가 박서보(90)의 ‘묘법’ 연작은 바탕칠 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선을 긋는 것이 핵심이다. 민첩하되 일정한 속도,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은 숨 쉴 겨를도 없다. 화백의 뒤로 팽팽하게 메어 밑칠한 캔버스가 보인다.
이들 화가의 진솔한 모습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는 인물 사진계의 거장 문선호(1923~1998). 카메라의 힘을 빌렸으나 진심의 눈으로 피사체의 진정성을 찾아냈기에 ‘휴머니즘 사진작가’로 불리는 이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한국인’을 주제로 작업한 그는 미술인들과의 친분을 발판으로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을 기획, 출판하기도 했다. 생전에 작가는 “각 분야에서 나라를 위해 빛을 낸 인간상들을 찾아 포토 다큐멘터리를 전개해 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 소원이 이뤄진 듯한 회고전이 24일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1·2층 전시장에서 개막했다. 각 분야의 빛나는 별 같은 인물들의 사진 180여 점을 모은 ‘문선호 사진, 사람을 그리다’전이다.
평안남도 중화가 고향인 문선호는 1944년 일본 가와바다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시대 최고 권위의 미술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박수근·장리석 등과 함께 입선한 적도 있다. 화가로 출발한 그가 사진으로 진로를 바꾼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고, 이후 줄곧 “카메라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비슷한 연배였던 화가 천경자(1924~2015)는 문선호의 카메라 앞에서 수줍은 듯 스카프로 얼굴을 반 쯤 가렸다. 서양화로 독자적 화풍을 이루고 ‘꽃과 여인의 화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얻은 천경자에게도 숨기고픈 속내, 말 못할 속사정이 있음을 함축한 사진이다.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개척한 오지호(1905~1982)는 중년 이후 여생을 보낸 광주 동구 지산동의 초가집 툇마루에서 문선호의 카메라를 마주했다. 키우는 강아지들을 어루만지는 부인, 그들의 모습을 자상한 미소로 바라보는 화가가 사진에 담겼다. 화가 장욱진(1917~1990)은 앞뜰에 핀 나무 곁에서 뒷짐 진 모습이다. 자연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작은 생명도 귀히 여긴 작가정신이 여실히 드러난다. 현대적 수묵추상의 선구자 산정 서세옥(1929~2020)은 비스듬히 기대 앉아 한문책을 읽는 중이다. 우리시대 마지막 선비화가의 위엄이다.
전시장 1층에는 이들 예술가와 함께 문인(文人), 방송인, 성악가 등의 사진이 걸렸다. 더없이 빛나던 전성기의 배우 윤정희 등 반가운 얼굴이 많다. 2층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문예인들의 모습을 담은 180여 점의 작품으로 채워진다. 제2전시장에는 큰 울림을 전하는 순수사진 20여 점도 함께 선보였다. 생전에 사용했던 카메라 등의 자료도 볼 수 있다. 사진찍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인간에 대한 관심, 밀도있는 교감의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우는 자리다.
한편 작가 유족은 내년 서울 창동역 인근에 국내 첫 공립사진미술관으로 개관 예정인 서울시립의 ‘서울사진미술관’에 고인의 대표작을 기부할 예정이다. 미술관 측에서 구입 의사를 밝혔음에도 사회 환원으로 뜻을 모았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수장고로 작품이 들어가기 전, 대중들에게 다시 한번 작품들을 보여주고자 기획됐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