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단편 애니상 후보 ‘오페라’, 9분 러닝타임 속에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낮밤을 무한반복하는 과정 흘러가는 삶의 모습 그대로 보여줘… 하나의 ‘오페라’를 보는 듯 웅장하게 담아
에릭 오 감독 “제작하는 기간 각종 사회문제에서 영감…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 후보에 오른 ‘오페라’의 에릭 오 감독. /사진제공=BANA

지난 15일(미국 현지시간) 공개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상 최종 후보 명단에서는 이미 큰 화제가 된 영화 ‘미나리’의 출연진·제작진 외에 또 한 명의 한국계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작품 ‘오페라’(Opera)로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른 에릭 오(한국명 오수형) 감독이다. ‘오페라’는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오는 4월25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아카데미상 최우수 단편 애니 후보에 오른 ‘오페라’의 스틸컷. /사진제공=BANA

‘오페라’는 영화제 출품을 위해 제출한 것을 제외하면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오 감독의 소속사 비스츠앤네이티브스(BANA) 측은 러닝타임 약 9분의 이 작품이 낮과 밤이 끝없이 반복되는 형태로 구성돼 있으며, 그 속에서 인류 역사의 계층, 문화, 종교, 이념 간 갈등을 거대한 스케일로 담아냈다고 설명한다. 애초에는 8K의 고해상도로 제작해 전시장 등의 대형 화면을 통해 무한 반복 상영하는 것을 염두에 뒀지만 충분히 크지 않은 화면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재편집을 거쳤다.


BANA 측이 일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오페라’의 플롯은 일반적 극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한 가지 장면과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기승전결 구도를 따르는 전형적 흐름 대신 거대한 공간을 ‘관찰하는’ 듯 한 느낌으로 묘사한다. 그 안에서 인물들은 그저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며 하루를 보내고, 영화는 끊임 없이 흘러가는 삶의 모습을 그저 ‘보여준다’. 영상 속 인물들은 하나의 사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집단 속에서 톱니바퀴 돌아가듯 움직인다. 언뜻 보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길 거듭하는 것만 같지만 저마다 내러티브를 갖고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없으면 집단이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서로가 정교하게 맞물려있다.



아카데미상 최우수 단편 애니 후보에 오른 ‘오페라’의 스틸컷. /사진제공=BANA

어떤 이는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나 떠는 듯 하고, 왕의 차림을 한 이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먹을 것을 먹어 치우는 게 하루 일과다. 학교로 보이는 공간에서는 수업 중간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한 쪽에서는 판관이 죄인을 벌하는 장면을 반복한다. 이렇게 각자 반복하는 행동이 생산해 내는 결과물은 그 구역 내에서 순환하며 다른 인물이 일하는 재료가 되기도 하고 일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면을 통해 만난 오 감독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메시지가 ‘희망’이라고 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회 문제와 정치적 상황, 자연 재해 등을 보며 무력함을 느꼈다”며 “스스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방향으로 삶과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작품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만드는 4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작품의 땔감이 됐다. 한반도의 남북 문제부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BLM’(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 홍콩 민주화 시위 등이 큰 영향을 줬다. 오 감독은 “현실을 반영했기에 작품의 분위기 자체는 우울하게 비칠 수 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삶과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갈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아카데미상 최우수 단편 애니 후보에 오른 ‘오페라’의 스틸컷. /사진제공=BANA

오 감독은 ‘도리를 찾아서’, ‘인사이드 아웃’ 등의 제작에 참여한 픽사의 애니메이터 출신이다. 특히 ‘도리를 찾아서’에 나온 문어 행크의 움직임은 그의 솜씨다. 독립 후엔 단편 ‘피그:더 댐키퍼 포엠즈’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TV프로덕션부문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독립적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든 작업에 대해 그는 “픽사 등 대형 스튜디오 만큼의 임팩트는 부족할 수 있지만 제 목소리를 오롯이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밝혔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페라’와 함께 경쟁을 벌일 후보작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영화 ‘소울’ 개봉 당시 함께 소개된 픽사의 단편 애니 ‘토끼굴’(Burrows), 넷플릭스가 제작한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 베를린영화제 아우디단편영화상 수상작인 ‘지니어스 로시’(Genius Loci) 등이다. 오 감독은 “정확히 1년 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던 순간이 생생한데 그 자리에 바로 오르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면서도 “‘오페라’가 담고 있는 작품성과 가치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아카데미상 최우수 단편 애니 후보에 오른 ‘오페라’의 스틸컷. /사진제공=BANA

한편 오 감독은 올해 미디어아트 전시 등을 통해 ‘오페라’를 선보일 계획이다. 최근에는 가상현실(VR) 작품인 ‘나무’도 완성해 올해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영한 바 있다. 신작 ‘나무’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생각한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그는 전했다.



‘오페라’ 포스터. /사진제공=BANA


/박준호 기자 violator@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