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뒤안길] 북한의 국보유적 공민왕릉

섬세하고 다양한 석물 품어…조선 왕릉의 기본

북한 개성시 소재의 공민왕릉. /사진 제공=문화재청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 남쪽의 무선봉 중턱에 위치한 현릉(玄陵)과 정릉(正陵)은 고려 말의 개혁 군주인 공민왕이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묻힌 곳이다. 두 묘는 ‘공민왕릉’으로 불리며 북한 국보유적으로 지정돼 있다. 현릉이 공민왕, 정릉은 노국대장공주의 능이다. 공민왕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축조 방법에서도 고려 말 왕릉의 완성된 형식으로 평가받는다. 섬세하고 다양한 석물을 가졌으며 조선 왕릉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여겨진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은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비통함을 참지 못해 충렬왕의 비인 제국대장공주의 고릉(高陵)을 본받되 그보다 더 화려하게 정릉을 만들었다. 1366년 정릉과 나란히 수릉(壽陵·생전에 만들어놓은 무덤)인 현릉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쌍분인 정릉과 현릉의 봉분 높이는 약 650㎝, 직경은 약 1,300㎝다. 봉분의 아래쪽으로는 12면의 병풍석이 자리 잡았는데 그 위아래로 다양한 종류의 석재를 배치해 병풍석을 고정시키고 있다.


공민왕릉은 러일전쟁 시기 일제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는 능의 뒷부분을 폭파시켜 도굴을 감행했는데 파괴된 능은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의해 수리된 상태다. 최근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이전에 방문했던 공민왕릉은 봉분을 둘러싼 석물들 사이로 시멘트를 발라 연결시킨 것이 확인됐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은 시멘트를 이용한 복구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공민왕릉을 복구할 당시만 해도 이러한 방식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공민왕릉은 북한 정권의 수립 당시부터 중요한 문화재였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공민왕릉에 대한 현지지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꾸준한 관심과 관리가 있었다. 이 같은 노력은 공민왕릉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결실을 거뒀다. /박성진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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