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괘불 안에는 온화한 표정의 석가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모서리에는 불교에서 사방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표현되는 무시무시한 표정의 사천왕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다른 괘불과 비교하면 사천왕상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그려진 이 그림은 오랜 복원 과정을 거쳐 대중 앞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국보 301호 화엄사영산회괘불이다.
그림보다 더 독특한 것은 괘불이 전시된 장소다. 사찰 법회 때 경내에서나 볼 수 있던 괘불이 한국 최대 가톨릭 순교 성지인 서울 중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 걸려 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성인과 복자 등 정치·종교적 박해로 수많은 이들이 처형돼 로마 교황청이 국제 순례지로 선포한 이 곳에 한국 불교 예술의 상징인 화엄사영산회괘불이 내걸렸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12일 개관 2주년을 기념해 특별 기획한 '현대불교미술전 - 空 ??nyat?'이다.
가톨릭 기관에서 주최하는 불교미술전으로 개최 전부터 이목을 끌었던 이 전시회는 예술을 통해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서고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은 자리다. 관세음의 불교 사상을 주제로,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정치·사회 이슈와 생태·환경 문제, 개인적 삶에서 마주치는 업보 등 세상의 소리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날 특별 전시로 공개된 화엄사영산회괘불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불화로 높이 12.08m, 폭 7.69m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이다.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지 13년 만, 복원 후에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소개되는 전시이기도 하다.
박물관 지하 2층 콘솔레이션 홀 앞쪽에 전시된 괘불은 천정부터 바닥까지 내려오고도 다 펴지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작품으로, 전시 공간을 놓고 적잖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관장인 원종현 신부는 "화엄사 주지 덕문스님에게 괘불 전시를 의뢰했더니 대중들과 호흡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의미를 전달하며 흔쾌히 허락하셨다"며 "현대불교미술전은 박물관이 종교와 사상의 경계를 넘어 모두에게 열린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실현하는 또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교 사상이자 한국 전통 사상인 ‘공(空)’을 현대미술의 다양한 언어로 표현한 작품들도 소개하고 있다. 불교 조각과 불화의 조형미에 현대의 시대상을 덧입혀 살아있는 종교미술을 모색한다는 취지다. 전시에는 강용면, 김기라, 김승영, 노상균, 이수예, 이용백,전상용, 천경우 등 국내외 현대미술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참여했다.
김기라 작가의 '장님-서로 다른길' '세기의 빛-정토'는 각각 10여 분 분량의 영상 이미지 작품으로, 전자는 세대 간, 남녀 간, 계층 간 갈등과 대립 상황을 나타내며 후자는 이러한 세상의 소리에 대한 명상과 성찰을 유도하는 불교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작품이 전시된 공간에는 순교 성인 5위의 유해함이 자리하고 있다.
이주원 작가의 '길에서 조우하다'는 불보살의 깨달음이나 활동을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수인을 빛으로 표현했다. 이 밖에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노상균 작가의 불상 작품 '숭배자들을 위하여'와 이용백 작가의 마네킹 작품 '피에타: 자기증오' 등 불교 사상을 현대적 기법으로 표현한 회화와 조각, 설치미술, 비디오 영상 등 다양한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김영호 예술 감독은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는 어려운 현실에서 이번 전시가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 보편적 진리의 이상을 현대미술의 형식을 통해 성찰하고, 그 예술적 결실을 대중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기회로 작용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전시는 6월30일까지.
/최성욱 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