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작품에서 정말 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왔지만, 관객들이 기억하는 엄태구의 이미지는 ‘밀정’과 ‘택시운전사’에서 보여준 그것이다. 바싹 마른 얼굴에 살기로 가득한 눈빛,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허스키한 목소리. 친하면 든든하지만 안 친하면 두려운 ‘무서운 사람’을 그보다 잘 표현해 낼 배우가 또 있을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엄태구표 느와르 ‘낙원의 밤’을 그렇게 기다렸는지 모른다. 뭔가 일을 내도 크게 낼 것 같았던 영화는 관객들이 그에게 바라는 대부분의 것을 선사했다. 상당한 몰입도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긴장감을 높여가는 이야기의 흐름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아쉽게 했다.
영화 속 진한 남성미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 화상으로 만난 엄태구는 작품의 완성도에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대본의 힘과 가족에 대한 애착, 자타가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들의 조합까지 흠 잡을 곳이 없었다고. 주인공 이름도 태구였던 만큼 캐릭터가 자신을 찾아온 셈이었다. 그 역시 “현장에서 연기할 때 계속 태구로 불려서 자연스럽게 그 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극중 태구는 끔찍이 아끼던 누나와 조카를 상대 조직에 의해 잃게 되자 그 조직의 보스를 살해하고 제주로 잠시 도망친다. 무기거래상 쿠토(이기영)의 집에 잠시 머물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시한부인 쿠토의 조카 재연(전여빈)은 그런 그의 모습에 점차 동질감을 느껴간다.
“굳건한 대본에서의 태구 느낌이 좋았어요. 누나와 조카, 내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아무래도 많은 회차를 촬영하다 보니 더 많이 고민했고, 작품 속 태구와도 정이 들었지만, 감독님 배우들 스태프 모두와도 깊은 정이 든 작품이에요.”
조직의 중견간부를 연기하기 위해 체중을 상당히 늘렸다. 목표는 10㎏이었는데 딱 1㎏ 모자랐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어도 확실히 할 수 있었다며 웃고는 “보충제가 확실히 효과가 있더라”며 솔직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불어난 체중은 탄탄한 몸매를 만들었고, 이는 상대 조직 보스를 살해하는 ‘사우나 신’의 강렬함을 배가시켰다. 그러나 정작 그는 “현장에서 처음에는 부끄러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웠다. 상대 배우들이 속옷만 입고 액션을 받아야 했는데 많이 아프고 고생하셨다”며 tvN ‘바퀴 달린 집’에서 보여준 ‘완전 착하고 수줍은 형’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여러 작품들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로 관객들을 얼어붙게 만든 만큼 실력은 확실했지만, 그를 단독 주연으로 쓴다는 것은 모험이기는 했다. 그 역시 박훈정 감독이 모험을 원하는 것 같았고, 본인도 그렇게 느꼈다고.
“‘밀정’ 촬영 현장이 자주 생각났어요. 왜 그런가 떠올려보니 그때도 김지운 감독님께서 모험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 믿어주신 것에 대해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낙원의 밤’ 현장에서도 ‘밀정’ 촬영장 생각이 나고, 꼭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가 태구를 연기하며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한 부분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공감하지 않으면 연기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매 장면마다 태구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가족을 잃고 속이 뒤집힌 태구의 분노와 제주에 숨어둔 이후 클라이맥스까지 점점 숨을 옥죄여오는 긴장감이 잘 살아났다.
“내적으로 누나와 조카가 사망한 그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혼자 애썼어요. 태구는 전부를 잃은 거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티는 안나도 계속 그 마음을 품고 있으려고 노력했고 감독님께서도 한계단 한계단씩 디렉션을 잘 주셨어요.”
“태구가 눈물 흘리는 버전도 있었어요. 예로 시신보관소에서 누나와 조카의 모습을 보며 울컥하는 장면도 찍었고, 제주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며 눈물 흘리는 장면도 찍었어요. 영화를 보고 나니까 눈물을 안 흘리는게 더 좋은 것 같네요.”
파트너 전여빈과 상대 조직의 중간보스 ‘마 이사’ 차승원, 태구의 형님인 ‘양사장’ 박호산 등 다양한 인물들이 극 안에서 제 역할을 해낸다. 엄태구는 배우 한명 한명마다 각자 부러워할 점이 있다면서 장시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여빈은 ‘죄 많은 소녀’에 대한 기사 중 연기괴물이라고 하길래 궁금해서 봤더니 정말 그 표현이 맞더라고요. 저는 진심으로 괴물이 맞다고 생각해요. 차승원 선배는 따라하지도 못할 카리스마를 보여줬고, 박호산 선배는 ‘양사장’ 캐릭터에 저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기영 선배는 현장에서 얼굴만 찍은걸 보고도 깜짝 놀랄 아우라를 느꼈어요. 특히 연기하기 전 그 여유,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을 재미있게 해주시는 연륜과 여유가 너무 부러웠어요.”
작품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자마자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지만, 적어도 배우들에 대한 연기 지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당장의 평가에 일희일비 하기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어떻게 인식될지가 중요하다고 봤다.
“표면적으로는 예산이 많이 들어간 영화의 첫 주인공인데 작품 평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는 없죠. 하지만 이 작품이 어떻게 남을지는 2년 3년, 아니 5년 정도 지난 후에 더 명확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아쉬운 점은 극장에서 큰 화면과 사운드로 다 같이 볼 수 없다는 것. 그래도 여러 나라에 한번에 공개되는데 신기하고 반응이 궁금하긴 해요.”
/최상진 기자 csj845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