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경제의 근간인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고, 국내에서는 백신 늦장 수급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미중 간의 패권 전쟁으로 산업의 지형이 통째로 바꾸는 절체절명의 상황인데 백신 접종마저 늦어져 우리가 글로벌 경제 회복 추세에 역행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증폭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재계의 원로들은 물론 각계 전문가들까지 우리 반도체 산업을 지키고 백신 수급을 앞당길 정부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1위 기업 삼성전자가 반도체 패권 전쟁에 적극 뛰어들 수 있도록 이재용 부회장을 서둘러 사면하고 이 부회장을 비롯한 기업인들의 민간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백신 수급도 앞당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19일 서울경제와 통화한 재계 및 학계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기업과 정부가 한 몸이 돼야 할 때”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019년 사면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글로벌 현장에서 사활을 걸었던 것처럼 국가와 기업의 자원을 총동원해서 위기를 돌파해야 할 시점이라는 조언이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연합회장은 이날 “벼랑 끝에 몰린 한국 반도체 산업과 국가 경제를 살려야 한다”면서 재차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 회장은 앞서 홍남기 국무총리 직무대행을 만난 자리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을 공식 요청했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이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로 백신 확보에도 힘을 보태게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비교적 잘 극복해온 한국 경제가 백신 수급난으로 ‘코로나 열등생’이 될 수 있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위기 속에서도 우리 경제를 유지해온 힘이 결국 ‘반도체 수출 경쟁력’이었던 만큼 이를 사수하기 위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강인수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숙명여대 교수)은 “백신 접종으로 글로벌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데 한국은 되레 평균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가 나오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이면 내년, 내후년 우리 경제가 계속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차원에서라도 경제계에 대규모 투자와 결단을 할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산업의 쌀’인 반도체를 두고 글로벌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한 만큼 삼성전자가 초격차 리더십을 유지할 해법을 정부와 기업이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이 부회장이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을 때 네덜란드 장비 업체 ASML부터 뛰어간 것은 장비 확보가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면서 “삼성이 구축한 글로벌 공급망을 지킬 절박한 사람이 직접 나와서 뛰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재욱 경희대 명예교수도 “LG그룹이 20년 전 배터리에 투자했을 당시에는 이익도 안 나는 사업이었으나 오너가 관심을 가져서 시작할 수 있었다”며 “반도체 수급난에 온 세계가 시달리는 이때 총수가 없다는 것은 세계적인 기업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특히 전 세계적인 백신 수급난 속에서 국가의 외교적 자원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우리 글로벌 기업들의 민간 네트워크를 총동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잇따랐다. 백신 주도권을 쥔 미국과 유럽을 설득할 우리만의 ‘카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백악관이 소집한 반도체 회의에 삼성전자가 불려간 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면서 “미국이 입장에서는 반도체 전쟁에서 이기게 해줄 핵심 기업이 삼성전자이며 그 카드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원장도 “백신 수급이라는 일회용 목적에서가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명분을 살리며 이 부회장 등 기업인들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만약 이 부회장이 문 대통령 미국 순방에 같이 가게 되면 미국도 반도체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작용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재계와 학계에서는 정부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셈법’에만 골몰해 기업인들의 기를 살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호소도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사면을 두고 벌어질 각종 진영 갈등을 정부 여당이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이 반도체 초격차 투자나 백신 수급 등의 절박한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 단체의 한 부회장은 “지금 우리의 외부 환경이 이것저것 재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안 교수도 “결국 경제는 기업이 끌어가야 하며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은 기업가다”면서 “정부가 경제와 기업의 생리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홍우 기자 seoulbird@sedaily.com, 송종호 기자 joist1894@sedaily.com, 변수연 기자 dive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