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의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대구 지역 최초로 출토됐다. 목간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 조각을 다듬어 글씨를 적어두던 기록용 유물로, 지금으로 치면 물품 꼬리표나 송장 등의 용도로 쓰였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대구 팔거산성을 발굴조사 중인 (재)화랑문화재연구원은 28일 현장 설명회를 열고 목간을 공개했다. 팔거산성은 지난 2015년의 지표조사, 2018년의 시굴조사를 거쳐 지난해 10월부터 학술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목간을 발굴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적외선 사진 촬영, 판독 자문회의 등을 마쳤다.
11점의 목간 중 글자가 보이는 것은 7점. 이 중에서 발견된 임술년(壬戌年)과 병인년(丙寅年)이라는 글자가 제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이는 각각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돼 목간이 7세기 초에 만들어졌음을 시사했다.
목간의 내용은 곡식 이름이 주를 이뤘다. 보리(맥·麥)와 벼(도·稻), 콩(대두·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는 당시 산성에 물자가 집중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산성의 행정 또는 군사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목간이 제작될 무렵인 7세기 초반부터 신라는 백제의 본격적인 침공을 받기 시작했다. 신라의 서쪽 지방 방어가 중시되는 상황에서 낙동강과 금호강의 합류 지점 인근에 자리한 팔거산성의 입지와 기능이 주목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연구소 측은 “특히 642년 신라는 백제의 침공으로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은 후 군사?행정 거점을 신라 왕경과 가까운 경북 경산의 ‘압량’ 쪽으로 옮겼다”면서 “신라 서쪽에서 왕경으로 이어지는 경로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팔거산성은 이 무렵부터 왕경 서쪽 방어를 위한 신라의 전초기지였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존에 출토된 신라 목간들이 대부분 군사와 행정 거점에서 발견됐고, 삼국 시대 신라의 지방 거점이 대부분 산성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편 목간에는 왕사(王私)와 하맥(下?)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들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