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수집부터 전격적인 기증까지, 이건희 회장과 삼성 일가는 다 계획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故) 이건희(1942~2020) 삼성 회장은 생전에 값을 따지지 않는 ‘명품주의’로 문화재·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는 ‘문화보국’을 일궜고, 작고 후에는 수집품 2만3,000여 점을 전격 기증해 그 성과를 사회 전체가 나눠 가지게 했다. 이 회장 유족들이 지난달 28일 ‘세기의 기증’을 공식 발표한 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과 광주시립미술관 등 국공립·지자체 기관에 기증된 작품 리스트를 접한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기증될 기관에 가장 필요하고 유용한 작품들만을 엄선한 것에 또 한번 놀랐다”고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겸재 정선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를 포함한 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2만1,600여 점을 기증받았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은 40만 점의 소장품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전세계에 170점 정도만 현존하는 ‘고려 불화’가 빈 자리였기에 보물 제2015호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를 비롯해 ‘고려시왕도’ ‘수월관음도’ ‘자수 아미타여래도’ 등 고려 불화 5점의 기증이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겸재의 ‘인왕제색도’나 ‘고려 불화’들은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명품”이라며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청동방울’(국보 146호, 255호)과 ‘청동기’(국보 137-2호), 백제시대 금동불입상(국보 제128호, 134호) 등의 유물은 개인 소장품을 이 회장이 다시 사들인 것이라 연간 예산이 빠듯한 박물관이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기에 더 각별한 기증”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시가 500억원 짜리 ‘수련’을 비롯해 르누아르·샤갈·고갱 등의 작품을 단번에 기증받았다. 김환기의 1970년대 푸른색 전면점화 ‘산울림’과 1950년대 대형 작품 ‘항아리와 여인들’은 각각 최소 50억원 이상 100억원 대로 추산된다. 이중섭의 ‘흰소’ ‘황소’, 박수근의 ‘농악’ ‘절구질 하는 여인들’ 등 그간 미술관이 구하지 못한 그림들이 수장고에 들어왔다.
21점의 근대미술품을 기증받은 대구미술관의 최은주 관장은 “이인성·이쾌대 등 작가들의 고향이자 삼성의 뿌리인 대구로 보내준 선물같은 작품들”이라며 “마치 대구미술관 소장품을 꼼꼼히 살펴 연구한 듯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을 찾아 채워줬기에 더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인성은 대구 북구 산격동에 ‘이인성 사과나무거리’가 있고 대구미술관이 ‘이인성 미술상’을 운영할 정도로 중요한 작가다. 이 회장 유족은 이인성이 부인을 그린 대표작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등 이인성 작품만 7점을 대구미술관에 기증했다. 경북 울진 태생의 한국추상미술 1세대 작가 유영국의 작품도 5점이나 쾌척했다. 최 관장은 “유영국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는 대구미술관에 작가의 전성기 작품을 기증해줬다”면서 “대구 출신으로 월북한 이쾌대의 1960년대 작품 ‘항구’ 등 지역 기반 작가들의 활동상을 연구할 중요한 작업들을 기증받았다”고 말했다.
전남 화순 출신이나 광주를 대표하는 작가로 오지호가 거론되지만 정작 소장품은 7점에 불과하던 광주시립미술관은 5점의 작품을 받아 안았다. 전승보 광주시립미술관장은 “오지호 작가 작고 후 주요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돼 전시할 때마다 빌려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면서 “김환기의 시대별 작품 5점,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시위 군중을 표현한 ‘군상(群像)’의 이응노 작품 11점, 이중섭의 ‘은지화’ 등 8점의 작품들이 5,230여점 소장품의 빈자리만 꼭 찍어 채워줬다”고 밝혔다.
지난 3월 하순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지역 출신 작가 김환기,천경자,오지호 등의 작품 21점을 기증받았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김환기와 오지호 작품은 한 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시중에서 구할 수도 없는 작품들이라 감격했다”면서 “천경자 작품은 드로잉 2점 뿐이었는데 이번에 흙과 안료를 섞어 쓴 실험적 작품들을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이 관장은 “전남 진도 출신 의재 허백련의 귀한 화첩도 감사한 일이지만, 전남 지역의 주류인 ‘남도화풍’과 대조적인 채색화풍의 이당 김은호, 서양화가로 산(山)을 그린 유영국의 작품을 기증받아 비교연구의 기반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서울대미술관에는 원로 한국화가 일랑 이종상과 안영일, 김병종의 작품들이 기증됐다. 세 화가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서울대미술관 측 관계자는 “기증작품들은 작가의 구작이라 구하기 어려운 까닭에 전시 뿐만 아니라 연구 자료로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종상은 지난 1977년 5,000원권 화폐의 율곡 이이, 2009년에 5만원권의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유일한 생존 화폐영정 화가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어 이건희 회장과도 닿았다. 중구 태평로 옛 삼성 본관 로비에 걸렸던 폭 52m의 대형 벽화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기증된 이종상의 ‘부산항 풍경’(1975)은 작가의 청년기 희소작이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타계한 화가 안영일은 1966년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며 1983년 이후로 단색조의 추상화로 물의 수면을 그려왔다. 이번에 기증된 작품은 잘 알려진 ‘물’이 완성되기 이전인 1970년대 ‘작품’ 2점이라 작가의 화풍 연구에 결정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병종 작가는 서울대 미대 동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이 건립해 기증한 서울대미술관이 개관하던 2005년 당시 미술관장을 맡았던 인연이 있다. 삼성 측은 절제된 선과 온화한 색감으로 자연의 기운을 응축한 김병종의 대표작인 ‘생명의 노래’를 비롯한 19점을 서울대에 기증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은 이중섭의 작품 12점을 기증받았다. 특히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현재 이중섭미술관에서 바라본 섶섬의 모습이라 절묘하다. ‘국민화가’ 박수근이 1959년 국전(國展) 추천작가로 출품했다 해외로 반출된 ‘한일(閑日·한가한 날)’은 2003년 3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 나온 것을 사들여 이번에 강원도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됐다. 1965년 박수근 유작전 이후 공개된 적 없다 55년 만에 빛을 본 ‘농악’ 등 18점이 박수근의 고향 미술관에 자리 잡았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