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플래시’, ‘미스터 반도체’, 그리고 ‘황의 법칙’. 대한민국 반도체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황창규 전 KT(030200) 회장이다. ‘메모리 반도체 용량이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일명 ‘황의 법칙’은 2002년 황창규 당시 삼성전자(005930) 사장이 처음 언급한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꿈꾸는 엔지니어에서 삼성전자 사장, KT 회장, 그리고 지식경제부 연구개발 전략기획단 초대 단장으로 세계 IT 경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온 그가 온갖 풍파 속에서도 30여년 동안 묵묵히 한 우물을 묵묵하게 팔 수 있도록 붙잡아준 밑동은 ‘사람’이었다. 기술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온 그는 말한다. “나는 지치지 않았고 그들의 솔직함과 진취적인 성향에 매료됐다. 이들이 불어넣은 영감으로 나는 내 능력 이상의 성과를 만들 수 있었다”고. 신간 ‘빅 컨버세이션’은 지난 30여년간 미스터 반도체가 경험한 ‘만남’에 대한 책이다. 이건희, 스티브 잡스, 클라우스 슈밥, 에릭 슈미트 등 이름 앞에 ‘혁신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인물들을 만나 나눈 대화와 인상적인 일화들을 정리했다. 미래를 이끈 리더들과의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영감으로 가득하다.
책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의 일화로 시작된다. 2001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이던 저자는 이 회장의 호출을 받는다. 일본 도시바와의 제휴 문제를 결정짓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의 도시바는 삼성전자가 D램 기술을 전수해주면 대신 낸드플래시 기술을 삼성에 전수하겠다고 제안했다. 도시바의 낸드 점유율은 45%, 삼성은 그 절반인 25%였던 시절이다. “해볼 만한가?” 그룹 최고 경영진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 회장이 물었고, 저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플래시는 미래 반도체 산업의 핵심입니다. 일부 기술만 보완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몇 번의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이 회장은 어떤 이의도 없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기분 나쁘지 않게 정중히 거절하고 우리 페이스대로 나가도록 하지.”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당시 이 회장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도시바의 제의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 저자의 의견을 들은 것이었다. 안정적으로 1위 사업자와 시장을 나누는 대신 던진 승부수는 옳았다. 삼성은 1년 만에 도시바를 따라잡으며 순위를 역전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저자는 또 다른 일화를 소개하며 ‘이 회장의 리더십이 단순히 미래에 대한 혜안이 풍부하다는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고 회상한다. IT 불황이 닥친 2001년 어느 날, 이 회장이 12인치 웨이퍼 개발 현황을 물어 왔다. 저자가 “투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질타가 쏟아졌다. “황 사장은 이때까지 1등도 해보고 지금 자리에 왔지만, 황 사장이 지금 투자 안 하면 후배들은 언제 1등을 해보고 글로벌 1등을 지킬 수 있겠나.” 이때의 투자로 삼성은 현재까지도 상용화되고 있는 12인치 생산라인을 갖추고 세계 최고 기술과 제조 생산 능력으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책 말미에는 고인이 된 이 회장에 대한 저자의 짧은 추모 글도 담겨 있다.
또 다른 혁신가인 고(故)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와의 만남도 흥미롭다. 저자는 애플의 아버지를 ‘사나운 열정이 만들어내는 섬세함과 독특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려준 인물로 기억한다. 몇 번의 만남에 걸쳐 잡스는 일관된 주장을 폈다. ‘현재 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한발 앞서 미래를 준비하자’는 메시지였다. 그는 저자에게 “닥터 황, 기술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요”라고 묻는가 하면 수시로 전화를 걸어 다양한 신기술을 물어봤다고 한다. 요즘도 강의 현장에서 ‘우리에겐 왜 아직도 잡스 같은 혁신형 리더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저자는 “잡스는 영감과 완벽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고 비전을 공유하는 데 남다른 감각을 가진 리더였다”며 “그리고 남다른 비전과 열정을 더해 꿈꾸던 미래를 현실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각 장마다 소개된 이야기들은 ‘세계적인 혁신가들은 달랐고, 그네들의 삶이 나(저자)에게 가야 할 길을 안내해 줬다’고 말한다. 책은 이렇게 인간 황창규가 그동안 받은 것들을 누군가와 다시 나누려는, ‘나로 인해 누군가 더 나아지길 바라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를 통해 배움을 쌓자는 메시지에 더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혁신 리더들과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1만 9,000원.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