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약속에 가야 하는데 타고 있는 버스가 꽉 막힌 도로의 중앙에 있다면 우리는 차를 그대로 타고 있을지 아니면 중간에 내릴지 마음이 부산해진다. 차를 몰고 간다면 더더욱 마음이 불안하다. 도중에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으니 방법은 더 없다. 입찰과 입시의 결과를 기다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결과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고 싶어 안달한다.
이럴 경우에 사람은 주관적인 시간과 객관적인 시간이 벌어지는 괴리를 체험한다. 즉 합격 통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시간이 실제보다 느리게 간다고 느낀다. 1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1시간이나 지난 듯하다. 이 경우 시간의 느낌을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로 표현하기도 한다. 짧은 순간이 3년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거나 즐거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실제로 하루가 다 지나갔는데도 마치 1시간도 채 안 지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이 두 종류의 시간을 경험할 때 심리 상태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전국시대의 장자는 이를 ‘좌치(坐馳)’로 표현했다. 좌치의 조어는 원래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형용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과 서서 달린다는 말이 하나로 어울릴 수 없는데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당연히 일어서서 달려야 하는데 ‘좌치’는 제자리에 앉아서 달린다고 하니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으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역설적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약속에 늦거나 원하는 결과를 기다릴 때 사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상황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서두른다고 해 꽉 막힌 도로가 갑자기 뻥 뚫리지도 않고 기한이 돼야 공표되는 결과가 나에게만 빨리 전달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하므로 무엇이든 하려고 애쓴다. 창밖을 내다보거나 스마트폰으로 도로 상황을 검색하기도 하고 연락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인다. 장자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하며 무리수를 두는 상황을 나타내기 위해 ‘좌치’라는 형용모순의 언어를 창조해냈다.
지금 코로나19의 상황도 자칫 좌치의 심리 상태에 놓이게 되면 제 가닥으로 풀리기는커녕 더 꼬일 수도 있다. 코로나19 감염자가 확연히 줄어들지 않고 장기화되다 보니 체감 시간은 실제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이러한 심리적 간격이 크게 느껴지면 모든 분야에서 ‘빨리’를 외치는 다급한 소리가 더 커지고 더 퍼지게 된다. 집합 금지의 기한도 빨리 끝나고 백신도 빨리 확보해 접종해야 여행처럼 하고 싶은 일도 빨리할 수 있다. 이러한 다급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시간은 결코 더 빨리 가지 않고 더 느리게 가지도 않고 제 속도로 갈 뿐이다. 이러한 간격이 길어지고 오래되면 사람이라면 심리적 안정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장자는 좌치가 일상화하면 사람은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발을 하늘로 향한 채 살아가는 ‘도치지민(倒置之民)’이 된다고 경고한다.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기도 벅찬데 물구나무를 선 채로 살아간다면 삶이 얼마나 팍팍할지 길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해가 된다. 사람의 발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을 딛고 서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는 ‘좌망(坐忘)’을 제안한다. 사람이 입치(立馳), 즉 선 상태에서 달릴지언정 일단 앉은 상태에서는 좌치(坐馳)하지 않고 좌망(坐忘)한다. 즉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뜻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앎도 내려놓아야 한다. 시간과 상황이 걸리는 만큼 그대로 흘러가게 둘 뿐 억지로 극복과 반전을 꾀하면 꾀할수록 사람의 심리가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그렇다고 좌망의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 시간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경계를 다시 그어 볼 수가 있다. 이와 달리 할 수 없는 경계를 억지로 줄이려고 하면 도치지민이 좌치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될 뿐이다.
/여론독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