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젓하게 비단 조끼 입은 흰 토끼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며 바쁘게 뛰어간다. 이웃집 복돌이네 토끼가 분명하건만 웬 조끼며 웬 시계인고. 게다가 세상에, 말이 통하다니. 토끼가 조선말을 하는 걸까, 갑자기 토끼 나라 말을 알아듣게 된 걸까. 하여간 말이 통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게 이상한 게 아닐까.
이럴 때는 앞뒤 가리지 말고 무작정 토끼를 따라가야 하는 법이다. 뭔가 새로운 일이 펼쳐질 테니까. 그렇잖아도 따분한 참이라서 그림도 없는 책보다 재미있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좋아하는 애옥이랑 소꿉놀이하는 것보다 훨씬 신날지 모른다. 복돌이네 토끼도 나를 알아봤으니까 망설일 까닭이 없고 겁낼 필요라곤 없다.
토끼를 따라간 열 살 소년 웅철이에게는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혹시 하트 여왕에게 처형될 뻔한 영국 소녀처럼 되는 건 아닐까.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 앨리스 말이다. 애당초 토끼를 만난 것도 바로 그 아이 때문이었다. 애옥이 큰언니가 유치원 보모답게 맛깔나게 읽어주는 우습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책에서 이상한 토끼가 불쑥 튀어나왔으니까.
주요섭의 ‘웅철이의 모험’은 식민지 시기에 처음 발표됐다가 해방되자마자 단행본으로 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판타지 동화다.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의 소녀가 이상한 나라에서 겪은 놀라운 모험은 주요섭의 ‘다시 쓰기’로 거듭났다. 옥스퍼드대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이들과 가까이 지냈다. 특히 앨리스라는 꼬마 숙녀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창작했다. 주요섭은 앨리스 이야기를 소년 웅철이의 멋진 모험으로 다시 써서 식민지 어린이들에게 선물했다.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간 웅철이는 땅속 나라부터 달나라와 해나라를 거쳐 별나라를 여행한다. 웅철이가 땅속 나라에서 처음 마주친 것은 눈먼 쥐들이 일하는 공장이다. 눈먼 쥐들은 눈뜬 쥐들에게 노예처럼 착취 당하고, 눈뜬 쥐들 위에는 더 큰 도둑놈인 인간이 있다. 전쟁도 벌어진다. 개미 군대가 꽃의 정령들을 침략해 잔인하게 짓밟는다. 차별과 억압, 착취와 지배, 침략과 전쟁이 벌어지는 땅속 나라는 웅철이가 살아가는 식민지 조선의 모습 그대로다.
달나라와 해나라도 앨리스라면 결코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세계다. 계수나무 아래 할아버지 토끼가 절구질을 하고 있는 달나라는 실상 경찰의 감시와 감옥의 형벌로 유지되는 곳이다. 끔찍한 풍습도 있다. 토끼들의 원수인 거북이를 잡아다 매일 한 마리씩 불태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강 건너 불개들은 불평등한 국제법으로 억지를 부리며 선전포고를 해놓고 배상금을 강요한다. 증오와 복수는 가혹한 통치를 낳고 침략의 마수 앞에서 야합과 분열이 거듭된다.
하마터면 화형 당할 뻔한 웅철이는 새끼 용 덕분에 구출되지만 그림자만 살 수 있는 해나라 구경도 즐겁지 않다. 양반과 거지의 빈부 격차가 극심한 해나라 창고에는 먹을거리가 그득그득 쌓이고 썩어 넘친다. 그렇지만 탐욕스러운 부자 원숭이들은 가진 것을 불태워버릴지언정 약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웅철이 눈에는 아름다운 인어가 춤을 팔아 먹고사는 일조차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쯤 되면 웅철이의 여행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모험이 아니다.
대제국의 황금시대를 누린 앨리스는 맑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꿈꿀 수 있었다. 앨리스의 유쾌하고 발랄한 말장난은 어른들이 만든 질서를 조롱하고 풍자한다. 이상한 나라의 웅철이는 식민지 역사와 자본주의 현실을 모험한다. 과연 억압과 약탈 너머를 상상할 수 있을까. 웅철이는 간신히 아이들만 사는 별나라로 건너간다. 주인 없고 돈 쓸 데 없고 폭력이 사라진 세상, 자유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어린이 나라.
앨리스를 척박한 식민지로 데려온 작가 주요섭은 이 땅의 모든 어린이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다. 캐럴이 단 한 명의 소녀에게 이야기를 바친 것과 딴판이다. 수많은 웅철이가 함께 누려야 마땅한 평화와 해방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라, 미래 세대를 짜릿한 꿈과 상상으로 안내한 이야기가 바로 ‘웅철이의 모험’이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로 유명한 작가 주요섭은 실천적인 아동문학가이자 교육학자이기도 하다. 주요섭은 1919년 3·1운동으로 평양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5년 상하이 학창 시절에 일어난 5·30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을 처음으로 번역하고 이상한 제목의 모험동화 ‘?’를 발표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조선 교육의 결함’을 저술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대학교수를 지냈다. 상하이의 반제국주의 민중 운동과 미국 체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내놓기도 했다. 주요섭 역시 웅철이처럼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꿈과 환상으로 가득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론독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