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모리 반도체의 핵심은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부터 보겠습니다. 휘발성 메모리, 비휘발성 메모리로 나뉘는 메모리 반도체는 D램과 낸드플래시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D램은 전원이 꺼지면 저장되지 않고 날아가 버리지만, 낸드플래시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구현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낸드플래시는 속도는 비교적 느리지만 전원이 연결되지 않아도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죠. 낸드플래시는 최근 HDD의 대체제로 쓰이고 있는 SSD의 핵심 부품입니다.
D램과 낸드플래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기기들엔 물론이고 데이터센터에도 꼭 필요한데요. 데이터센터는 검색, 이메일, 온라인 쇼핑 등 인터넷 작업을 처리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와 스트리밍 서비스의 이용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수요도 늘고 있는데요.
최근 메모리반도체의 수요가 늘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이유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들이 새로운 데이터센터 구축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죠.
◇ 컴퓨터의 두뇌 CPU, 스마트폰의 두뇌 AP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엔 컴퓨터의 CPU, 스마트폰의 AP가 대표로 꼽힙니다. CPU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제하고,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처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반도체 칩입니다. D램, SSD 등의 메모리 반도체, 그래픽을 담당하는 GPU 등과 함께 컴퓨터를 작동시키죠.
반면 AP는 CPU, GPU, 그리고 통신칩 등 다양한 기능이 하나로 통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스마트폰의 성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부품이죠.
흔히 CPU의 최강자는 인텔, AP의 최강자는 퀄컴으로 불립니다.
◇ 보조 역할에 그치던 GPU…갈수록 중요성 커지는 이유는
그런데 최근엔 CPU만큼, 아니 CPU보다 더 GPU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GPU의 최강자 엔비디아는 2020년 하반기,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기업 시총 2위로 올라섰죠. 사실, GPU라는 개념을 만든 것도 엔비디아인데요. 1999년, 엔비디아는 자사의 첫 그래픽카드 지포스256을 내놓으며 그 안에 들어간 반도체칩에 GPU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GPU, Graphics processing unit은 처음엔 이름 그대로 그래픽을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컴퓨터의 화면 구성이 더 화려해지고, 컴퓨터 게임에서도 점점 더 고사양의 그래픽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CPU만으로 이를 감당하기엔 좀 무리가 생겼거든요.
CPU는 통제가 주목적이어서 성능이 뛰어나지만, 중앙에서 모든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계산해야 될 게 늘어날수록 속도가 느려지고 전력 소모가 크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GPU는 아주 복잡한 연산까진 할 수 없지만, 그 대신 방대한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병렬 처리 구조로 설계되어 있죠.
그러니까 CPU는 수학자 1명, GPU는 초등학생 1,000명이 문제를 푸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는데요. 고난이도의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경우엔 GPU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1+1, 2+2처럼 단순한 문제를 1,000번 풀어야하는 경우라면 1명이 문제를 1,000번 풀어야 하는 CPU보단 1,000명이 한꺼번에 문제를 풀어 답을 내놓을 수 있는 GPU가 훨씬 빠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장부터 핵심 역할을 한 CPU와 달리 GPU는 등장 당시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머리 역할을 하는 CPU와 달리 GPU는 보조 역할에 그친다고 봤기 때문이죠.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서며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인공지능의 딥러닝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부터였는데요. 딥러닝은 인공지능 학습(머신러닝)의 한 갈래로, 기계가 ‘사람처럼’ 학습하고 추론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기계에게 ‘직관’을 가르치는 거죠.
그런데 딥러닝은 기계가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돌려서 결과 값을 내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직관’을 구현하기 위해선 보다 더 뛰어난 성능의 CPU를 개발하는 게 답일 거라고 봤던 기존의 예상과 달리, 단순 연산 반복에 강점이 있어 방대한 데이터를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GPU가 사실상 딥러닝의 핵심이었던 겁니다.
나아가 자율주행 기술 역시 자동차가 주변의 방대한 데이터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처리해 결과 값을 내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딥러닝과 원리가 같습니다. GPU가 더욱 더 주목 받는 이유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비트코인과 관련해서도 GPU가 큰 이슈인데요. 단순 연산 반복으로 이뤄지는 비트코인 채굴에 중저가 사양의 GPU가 쓰이면서, GPU가 일시적으로 전 세계적인 품귀 현상을 빚으며 가격이 치솟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죠.
◇ 커지는 인공지능 시장, 떠오르는 NPU
자자,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반도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Neural Process Unit, NPU라고 불리는 반도체 칩인데요. NPU는 기존의 반도체 구조에서 벗어나 사람의 뇌를 모방해 만든 반도체를 말합니다. 뇌 신경망처럼 뉴런과 시냅스 구조로 반도체를 설계한 건데요. GPU보다도 훨씬 더 인공지능 딥러닝에 최적화된 반도체죠. 효율로만 따진다면 NPU는 GPU의 10배, CPU의 40배에 달하는 성능을 지녔습니다.
감이 잘 오지 않으신다고요? NPU가 상용화되면, 당장 우리 손에 있는 시리와 빅스비부터 크게 달라집니다. 지금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다 알아듣더라도 그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 우리의 명령을 데이터센터까지 보낸 후 그곳에서 답을 계산해 얻고, 그 답을 다시 가져와 대답하기 때문에 속도도 빠르지 않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실행할 수조차 없죠.
하지만 NPU칩 기술이 발전한다면, 네트워크가 끊겨도 인공지능 비서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비서가 생기게 되는 거죠. 나아가 NPU가 핸드폰 뿐 아니라 수많은 가전기기에 탑재되면 진정한 IoT가 이뤄지는 거고요. 이렇게 개별 기기가 단독으로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게 되는 걸 온디바이스AI라고 부릅니다.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분야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미래 기술의 핵심 부품으로 각광 받고 있는 NPU지만, 관련 기술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데요. 2019년 기준 NPU는 인간의 두뇌보다 100배 느립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기업들이 하루 빨리 기술을 선점해 NPU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기업들엔 기존 반도체 기업들뿐 아니라 다양한 IT 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주구장창 반도체 한 우물만 파온 기업들과 붙어서 이기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요?
◇ 삼전·애플·화웨이…디바이스 제조 기업들, AP 제작 나섰던 이유
사실 이들은 이미 반도체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AP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아까 AP의 최강자는 퀄컴이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퀄컴의 최강자 타이틀이 무색하게 최근 AP 시장은 과점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애플, 화웨이 등 주요 스마트폰 제조사가 자사 제품에 들어가는 AP를 독자 개발하고 있거든요.
어쩌다 AP까지 직접 만들게 됐냐고요? 몇 년 전만 해도 AP 시장은 퀄컴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2G, 3G 무선통신의 핵심 원천기술(CDMA)을 독점한 덕분이었죠. 퀄컴은 기술 사용에 대한 로열티를 과다 청구하거나 AP칩을 끼워 팔아 시장 점유율을 늘렸습니다. 심지어 이런 비즈니스 모델을 이용해 2019년도에도 라이센싱 매출을 두둑하게 챙겼죠. AP가 원가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보니 스마트폰 제조사들 입장에서는 손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에 대해 애플은 퀄컴을 상대로 세기의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동안 퀄컴에 돈을 퍼주다시피한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4G로 넘어가는 세대교체 시점을 노려 자체 통신 칩을 개발하기 시작했죠.
◇ IT공룡들 사이에 부는 자체 반도체칩 제작 열풍
PC에 들어가는 CPU 역시 비슷한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최근 애플은 자사의 M1칩을 탑재한 아이맥과 아이패드 시리즈를 공개했는데요. 작년 11월 M1칩을 처음 공개한 이후 두 번째 행보였죠. 당시 M1칩은 기존 인텔의 CPU보다 성능은 최대 6배, 배터리 사용 시간은 2배 증가시켜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특히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를 개량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샀습니다. AP는 CPU에 비해 전력 소모는 적은 대신 성능은 떨어져 PC에 사용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아왔거든요. 그런데 애플이 이 공식을 깨는 결과물을 내놓은 거죠. 인텔은 벙찔 수밖에 없었고요.
어떻게 애플이 인텔보다 발 빠르게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드는 게 가능했냐고요?
1980년대 PC 보급 이후 반도체 시장은 전통 강자들이 주도해왔습니다. 디바이스 제조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폭은 적었죠. 반도체 회사들이 제공하는 반도체 성능에 맞춰 제품을 내놓는 게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기기들이 발전하고 다양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인텔 같은 반도체 기업의 경우엔 가격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고, 반도체칩의 호환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하지만, 애플 같은 IT업체의 경우엔 가격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적고, 자사 제품‘만을’ 위한 맞춤형 반도체를 만들면 되니까요.
사실 실리콘밸리에서 자체칩 제작 열풍이 분 건 2018년부터였는데요. 애플, 구글, 아마존에 이어 페이스북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고, 2020년에 이르자 구글과 애플은 반도체 독립 선언까지 내놓았습니다. 테슬라, 아마존, 바이두 등 대부분의 IT기업이 자사 칩을 개발하고 있고요.
이렇게 보면 NPU칩의 개발에 IT 기업들이 뛰어드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심지어 NPU 시장은 전통 반도체 기업들이 뒤쳐져 있는 상태입니다.
애플이 스마트폰에 NPU를 탑재하기 시작한 건 2017년인데요. Face ID가 가능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사실, IT 업체들은 NPU 개발에 더 유리합니다. PC, 스마트, 각종 서비스 등 수많은 테스트 베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개발한 NPU를 바로 실험해볼 수 있고, 인공지능 학습을 위한 빅데이터 수집도 훨씬 쉽습니다. 칩 설계 경험은 많지만 이를 구현하고 적용해볼 플랫폼이 없는 전통 반도체 업체들은 오히려 불리하죠. 반도체 산업의 문법이 완전히 뒤바뀌고 있는 겁니다.
◇ 쉴새없이 변화하는 반도체 시장,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 밖에도 반도체 시장엔 크고 작은 변화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전통 반도체 기업들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죠? 인텔은 CPU와 메모리반도체가 작동하던 기존 구동 방식을 완전 깨버리는 새로운 체제의 반도체를 내놓겠다며 벼르고 있고, 엔비디아는 반도체 기초 설계도 회사 ARM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제작 구조를 짜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이 아시아의 파운드리 의존도를 낮추겠다며 국가차원에서 자체 공급망 구축에 나서고 있고, 각 분야에서 더 빠르게 더 뛰어난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한 기업 간 인수 합병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죠.
복잡하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반도체 산업 이야기. 앞으로 반도체 시장은 또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 또 어떤 혁신적인 기술이 나와 우리 삶을 바꿔놓을지, 기대되지 않나요?
/정민수 기자 minsoojeong@sedaily.com, 김현지 기자 loca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