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포스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전 세계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본격적인 '백신 외교' 경쟁에 돌입했다. 중국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보관이 용이한 자국산 백신을 자국 주도의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과 연계해 개발도상국에 집중적으로 제공하며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반면, 쿼드(Quad·미국 주도의 4국 안보 협의체)를 통해 대(對)중국 압박을 본격화한 미국은 일본과 유럽연합(EU) 등 핵심 동맹국을 중심으로 코로나19 백신 지원에 나서면서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중국 관영매체는 현 상황을 볼 때 코로나19 백신 외교는 중국이 한발 앞서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 중국 "백신은 공공재"…'일대일로' 개도국에 지원 집중
중국은 지난해 1월 우한(武漢)에서 코로나19가 대규모로 유행한 후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에 시달려왔다. 이에 지난해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이 백신을 개발하게 되면 개도국 등에 지원해 공헌하겠다는 '백신 공공재' 공약을 내걸었다.
중국은 그동안 일대일로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동남부 유럽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며 영향력을 키워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반중 감정이 커지면서 일대일로 정책이 위기에 봉착하자 자국산 백신 지원을 내세워 일대일로 재건에 나섰다. 이를 위해 시진핑 주석은 지난 2월 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 중국이 아프리카의 코로나19 방역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면서 일대일로 사업 협력을 심화하자고 제안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도 올해 1월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국가를 방문하며 코로나19 백신 우선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올해 상반기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의 순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이미 80여 개 국가와 3개 국제기구에 코로나19 백신을 지원했으며 50여 개국에 백신을 수출했다.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10여 개 개도국에서 기술 이전과 협력 생산을 전개하면서 중국산 코로나19 백신의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장하고 있다. 최근 시노팜(중국의약그룹)의 코로나19 백신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긴급 사용 허가까지 받으면서 중국의 백신 외교는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은 유엔평화유지행동과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미 큰 성과를 거뒀다"면서 "코로나19 백신은 글로벌 공공재로 중국은 개도국의 방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경쟁국인 미국의 코로나19 백신 정책에 대해선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다. 화춘잉(華春瑩)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은 백신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수표를 날리면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면서 "미국이 진정으로 타국 국민의 생명에 관심이 있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 미국, 동맹국 중심 백신 지원 확대…결집 가속할 듯
그동안 자국민 보호를 앞세우며 코로나19 백신을 자국민에만 접종해오던 미국은 대규모 접종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백신 지원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백악관 연설에서 화이자, 모더나, 얀센 등 자국민 접종에 활용해온 3종의 백신 2,000만 회 접종분을 6월 말까지 타국에 보낸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미 해외에 반출하겠다고 발표한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6,000만 회분을 포함하면 6월 말까지 해외로 보내는 백신은 모두 8,000만 회 접종분에 달한다.
미국의 이같은 결정은 6월 말까지 AZ 백신 6,000만 회분을 해외에 반출해 백신 공동구매 국제프로젝트인 코백스 퍼실리티에 40억 달러 지원을 약속했음에도 중국보다 기여도가 낮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미 자국산 백신의 대규모 해외 지원에 나선 중국과 비교해 '백신 외교'에서 밀린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총 8,000만 회 접종분 반출은 중국과 러시아가 지금까지 제공한 1,500만 회분보다 훨씬 많은 것이라며 미국의 향후 노력을 강조했다. 베이징 소식통은 "이는 사실상 중국이 독점해온 코로나19 백신 해외 지원에 미국이라는 거대한 경쟁자가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백신 외교전이 시작된 것"이라면서 "이는 사실상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주도권을 둘러싼 빅2의 기 싸움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코로나19 백신을 지원하는 국가에는 캐나다 등 인접국 뿐만 아니라 인도, 일본, 호주 등 쿼드 참여국 그리고 일본과 한국 등 핵심 동맹국들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고 백신 원료와 의료용 산소 관련 물자 등 다양한 긴급지원 제공에 합의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는 백신 전문가 그룹을 마련해 인도·태평양 지역의 영향력 확대 및 중국 견제를 위한 백신 지원을 논의해오고 있다.
아울러 미국은 최근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 면제를 지지하면서 백신 외교에서 앞서나가고자 노력하는 분위기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이달 초 성명에서 백신 지재권 면제를 지지한다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백신 제조를 확대하고 원료 공급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미국의 이번 결정에 대해 "지혜로운 리더십을 보여줬다"며 환영하는 등 개도국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독일 등 선진국들은 기술 유출 가능성 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미국과 EU 간 일부 균열도 일고 있다.
/박신원 인턴기자 shin01@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