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업계 역대 최대규모 거래(400억 달러)인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ARM 인수를 놓고 국내 경쟁당국인 공정거래위원회가 고민에 빠졌다. 글로벌 1위 그래픽처리장치(GPU) 업체인 엔비디아가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는 와중에, 아마존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이 ARM의 설계자산(ISA)을 기반으로 차제 서버용 CPU를 제작하려던 업체가 “독과점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D램 시장의 70% 가량을 차지하는데다 전체 D램 수익의 30% 이상을 서버용 D램에서 벌어들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또한 관련 이슈를 주시하고 있다.
17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공정위 기업결합정책과는 지난달 엔비디아의 ARM 기업결합 심사를 접수하고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엔비디아 측은 애초 3월에 관련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었지만 미국 경쟁당국과의 일정 조율 등으로 보고서 제출이 한달 가량 늦춰졌다.
공정거래법 12조에 따르면 외국 기업간의 합병이라도 이들 기업이 한국에서 각각 3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할 경우 공정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실제 삼성전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를 ARM의 ISA를 기반으로 만들고 있으며, 엔비디아는 ‘가상화폐 채굴 광풍’ 등에 따른 GPU 판매로 국내에서 막대한 수익을 기록 중이다. 공정위가 지난 2015년 반도체 설비제조사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와 일본 도쿄 일렉트론의 기업결합 이슈에 대해 “경쟁제한성이 있다”는 심사보고서를 발송한 후,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합병계획을 자진 철회할 정도로 공정위의 영향력은 크다.
문제는 엔비디아가 기존 GPU 외에 서버용 CPU 시장 진출을 본격화 하며 경쟁당국의 ‘시장구획’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엔비디아는 지난달 ARM의 설계자산 기반의 서버용 CPU인 ‘그레이스’ 출시 계획을 밝히는 등 관련 시장 장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는 인공지능(AI)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기술인 ‘GPGPU’를 기반으로 자율주행 등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대부분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 중이다.
반도체 설계자산 만으로 수익을 내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의 팹리스’또는 ‘칩리스’ 기업이라고도 불리는 ARM의 시장 구획 또한 쉽지 않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이 노트북이나 서버용 CPU 제작에 ARM의 설계 자산을 활용하거나 계획중에 있는데다, 모바일용 CPU의 80% 이상이 ARM 설계자산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경쟁당국이 엔비디아의 ARM 인수를 불허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번 합병이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글로벌 AP 시장의 13%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 엑시노스의 경우 관련 CPU외에 GPU 또한 ARM 기술 기반이다. 엔비디아가 ARM 합병을 기반으로 서버용 CPU 시장 구도에 변화를 일으킬 경우 국내 메모리 반도체 업체 또한 판매 전략을 새로 수립해야 한다. 국내 D램·낸드플래시 제조사의 매출은 수년전까지만 해도 모바일용 제품 비중이 40% 이상이었지만, 수년 전 주요 클라우드 기업의 데이터 센터 구축 확산으로 서버용 제품 수익 비중이 모바일용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공정위 관계자는 “미국, 중국, 영국 등도 관련 심사를 진행 중”이라며 “관련 이슈의 복잡성 등을 감안하면 결론이 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세종=양철민 기자 chop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