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20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최대 국립묘지 중 하나인 알링턴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한국전쟁 참전 전사자의 유해가 안치된 ‘한미 혈맹’의 상징적 장소에서 방미 일정을 시작하며 한미 간 공고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이 알링턴국립묘지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알링턴국립묘지를 찾았다. 알링턴국립묘지에는 참전 용사와 가족 약 40만 명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미국 신임 대통령이 취임식 직후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앞서 지난 세 차례 워싱턴DC 방문 당시에는 알링턴국립묘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최소화된 일정 탓에 방문 일정을 잡지 못했거나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다른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6월 취임 후 첫 방미 당시에는 문 대통령의 가족사와 얽힌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은 바 있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구조 작전인 ‘흥남철수’를 성공으로 이끈 전투로 이때의 피란민 행렬에는 문 대통령의 부모도 있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워싱턴 관구사령관의 안내에 따라 ‘무명용사의 묘’에 참배했다. 무명용사의 묘에는 한국전쟁을 비롯해 제1·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등에서 전사한 신원 미상 참전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문 대통령은 머나먼 이국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군인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이후 국립묘지 기념관 전시실로 이동해 무명용사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패를 기증했다. 기념패에는 ‘무명용사와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라는 글귀가 영문으로 쓰여 있었다.
문 대통령은 헌화 행사에 참석한 미국 측 인사들에게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미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거듭 사의를 표했다. 문 대통령은 또 “피로 맺어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진 한미 동맹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더욱 강력하고 포괄적으로 발전시켜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참배를 마친 문 대통령은 루스벨트 기념관을 시찰했다. 문 대통령은 평소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을 꼽아왔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정책도 대공황 위기를 극복하게 한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서 착안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코로나19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루스벨트 전 대통령과 비슷한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간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문 대통령은 이어 미 국회의사당으로 이동해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을 비롯한 하원 지도부와 함께 간담회를 가졌다.
한미정상회담이 열리는 21일에도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여러 행사가 예정돼 있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쟁 영웅에게 미군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을 수여할 예정이다. 백악관은 19일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전쟁 영웅인 랠프 퍼킷 주니어 퇴역 대령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한다”며 “이 자리에는 문 대통령도 참석한다”고 밝힌 바 있다. 94세의 백전노장은 1950년 11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적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며 205고지 점령에 성공한 전과를 거둔 바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고 부상을 당해 ‘자신을 놔두고 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소대원들이 그를 부축하며 전장에서 함께 탈출했고 그는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이 올 1월 취임 후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한국전 영웅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 문 대통령이 동참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뿌리 깊은 역사와 굳건한 관계를 양국이 강조하는 의미가 담겼다는 평가다.
같은 날 오전 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접견한다. 이번 방문의 하이라이트인 한미정상회담은 같은 날 오후에 진행된다. 단독·확대 정상회담 순이며 회담 직후에는 공동 기자회견도 예정돼 있다. 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코로나19 백신, 반도체, 배터리 협력, 대북 정책, 한미일 관계 등과 관련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이 자리에서 직접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할 예정이다.
정상회담을 마친 후에는 워싱턴 한국전쟁 기념공원에 건립되는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에 참석한다. 이 역시 끈끈한 한미 동맹을 상징한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6·25전쟁 제70주년 기념사에서 “워싱턴 추모의 벽을 오는 2022년까지 완공해 위대한 동맹이 참전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22일 오전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 추기경인 윌턴 그레고리 추기경과의 면담이 잡혀 있다. 오후에는 조지아주 애틀란타로 이동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공장을 방문한다.
/워싱턴=공동취재단 허세민 기자
/서울=허세민 기자 sem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