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원주의 얼

김선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김선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사진제공=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젊은 방황의 날들에 인생을 붙들어준 몇 권의 책이 있다. 묘사 하나하나 머리와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지금껏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은 단연 박경리 선생의 ‘토지’다. 선과 악으로밖에 구분할 줄 몰랐던 어린 나에게 함안댁은 기이한 탐구 대상이었다. 나약함 그 자체로 여겼던 이진사 댁 아들 상현은 또 어떠한가.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복잡·오묘함은 결국 나의 모습이자 인간의 모습이란 걸 두고두고 자각한다.


원주로 이전하고 첫 주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박경리문학관이었다. 3,000여 평의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하동에서 간도까지 수천 리 무대와 역사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책 내음 가득한 서재는 내 새로운 꿈이 되었다. 선생의 유일한 사치였다는 몽블랑 만년필만은 못하지만, 그 뒤로 만년필을 쓰기 시작했다. 불편하지만 매번 잉크를 채우면서 마음도 채운다.


지학순 주교와 박경리 선생으로 대표되는 원주가 한국전쟁 이후부터 각인된 이미지의 군사 도시가 아니라 한국 협동조합의 본산이라는 사실은 부끄럽게도 원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접하게 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사상이야말로 내가 오랜 날을 바쳐 고민한 의료보장과 맥을 같이한다.


원주의 사상이 이토록 풍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주는 고려시대 이래로 남한강 물길의 흥원창을 중심으로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였다. 남한강변의 거돈사지 등 거대한 폐사지가 이를 대변한다. 여기에 더해 ‘신들의 숲’ 성황림의 질경이처럼 이 땅을 지켜온 민중이 있었다. 이런 정신들이 모여 먹거리협동조합, 부모협동 어린이집 등 원주에 건강하게 뿌리내린 지역 공동체들과 지역 사람들이 생명의 도시를 이어간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원주 지역 주민들과 해마다 ‘잇다 장터’를 개최해왔다. 지난해에는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행사를 열 수 없었다. 대신 원주의 정신을 담은 동영상을 제작해 나누자고 직원들이 제안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렇게 멋진 영상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공공 기관이 만드는 지역 홍보 동영상이 뭐 다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길과 얼·시간을 주제로 원주를 재해석한 동영상 세 편이 만들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놓고 지금도 아껴 보고 있다. 볼수록 품격이 묻어난다. 제작을 잘한 덕도 있지만 원주라는 지역의 오랜 역사가 워낙 보석 같기 때문이다. 영상을 본 직원들과 주민들도 원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다는 반응이다. 가지 않았던 길도 꼭 가보겠다고 한다.


유럽 여행이 기억에 남는 것은 특산물이나 현란한 볼거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 하나, 건물 하나에도 피땀 어린 인류 역사 이야기가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두 발로 걸으며 역사를 느끼고 새겨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마음 가득 찬 새로운 양식을 발견한다. 하늘길이 막힌 지 오래다. 우리의 땅과 도시에 박혀 있는 정신으로 주린 마음을 채울 때다. 그 첫 번째로 원주를 권한다.


/김성태 기자 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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