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마오안잉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10월 7일. 마오쩌둥 중국 주석은 출정을 앞둔 펑더화이 사령관을 부른다. 마오쩌둥은 장남인 마오안잉을 전장에 데려가도록 지시한다. 펑더화이는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맏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겠다는 소리에 고개를 저었지만 “내 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누가 전쟁터에 간단 말이냐”는 말에 지시를 따른다. 대신 최전선 전투병이 아닌 자신의 러시아어 통역관 역할을 맡겼다. 마오쩌둥은 아내를 잃은 뒤 애지중지하던 아들을 이렇게 전장으로 보냈다.


마오안잉은 1922년 후난성 창사에서 마오쩌둥의 두 번째 아내인 양카이후이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창사 폭동 직후인 1930년 어머니가 국민당에 처형당하자 마오안잉은 상하이로 도주했다. 1936년 모스크바를 찾은 마오안잉은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소련군에 들어가 동부전선으로 보내졌다가 1946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에서 마오안잉은 신분을 감춘 채 러시아어 실력을 토대로 중국과 소련군의 매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참전 한 달여 만인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동창군에서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중국군 장교의 2003년 회고록에는 마오안잉이 방공 수칙을 어기고 계란볶음밥을 만들려고 불을 붙였다가 위치가 노출돼 전사한 것으로 돼 있다.


중국이 다음 달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역사 미화 작업’에 나섰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16일 전했다. 중국 역사연구원은 그중 마오안잉의 사망과 관련해 ‘계란볶음밥설’이 영웅적 면모를 깎아내리는 행위라며 “마오안잉이 지휘하던 사령부의 무전이 노출돼 폭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란볶음밥설이 담긴 회고록은 중국군이 공식 출판한 것인데 이마저 부인한 셈이다. 중국이 입맛대로 바꾸는 것은 자국 역사만이 아니다. 중국 관변 단체는 한국전쟁이 ‘미국의 침략 전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최근에는 김치까지 중국 문화라고 왜곡했다. 우리 정부가 일본에는 큰소리치면서 중국에는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안타깝다. 중국의 역사 비틀기에 안보 이상으로 단호한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영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