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내년에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 4월 20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이 배럴당 -37.63달러까지 주저앉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경제 재개와 원격 근무 등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당분간 원유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친환경 정책과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으로 원유 생산이 늦어지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 재개·새로운 생활 양식으로 수요 ↑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따른 경제 재개로 원유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억눌렸던 여행 심리가 폭발하며 국내 여행이 늘고 트래블버블(일부 국가 간 여행 허용) 시행으로 해외여행도 점차 늘며 항공 수요가 증가한 것이 결정적이다. 21일(현지 시간) 미 교통안전청(TSA)에 따르면 전날 미국 공항을 이용한 승객은 210만 761명으로 지난해 3월 7일 이후 가장 많았다. 항공 수요가 회복세를 보이자 델타항공은 내년 여름까지 조종사 1,000명을 추가 채용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새로운 생활양식이 자리 잡으며 원유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코로나19 이후 사람이 붐비는 대중교통보다 개인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이 늘고 원격 근무 확대로 여행이 비교적 자유로워질 것이라며 내년에는 유가가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필두로 한 각국의 친환경 정책은 원유 공급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알래스카 원유 시추를 중단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석유·가스 시추 목적의 연방 토지 임대 금지는 루이지애나 연방지방법원에 의해 효력이 중지됐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비슷한 정책을 추진할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급 병목 현상이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탈탄소 정책 등은 공급쪽 마이너스 유인
원래 유가 상승은 셰일 업계에 생산량을 늘릴 기회로 작용했다. 셰일 업계는 퇴적암층인 셰일층에 매장된 가스를 추출하는데 생산 단가가 높아 유가가 최소한 40달러대에 형성돼야 채산성이 있다.
하지만 유가가 치솟는 상황에서도 셰일 업계는 생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금융계가 기업 투자 시 ESG 요소를 적극 고려하겠다고 공언하자 셰일 업계에 대한 투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셰일가스 추출 때 사용되는 수압파쇄기법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수질오염을 일으킨다는 비판을 받는다. 실제 프랑스 최대 은행 BNP파리바는 미국의 석유 및 가스 회사에 대한 대출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BofA와 JP모건·모건스탠리 등도 이들 업체에 대한 대출 규모를 줄였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유가가 하락했던 지난해 셰일 업체가 많이 파산했다. 미국 셰일 혁명을 이끈 체서피크에너지조차 파산보호 신청을 했을 정도다. 그나마 남은 셰일 업체들도 당장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일단 현금을 모으고 있다.
영국 자산운용사 야누스헨더슨은 “한때 셰일 업계는 보유 현금 규모의 120~130%를 가스 생산에 투자했지만 지금은 70%도 투자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6월 기준 1,120만 배럴에 그쳐 코로나19 직전인 지난해 2월의 1,310만 배럴에도 못 미쳤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도 생산량 증대에 우호적이지 않다. 보통 OPEC은 셰일 업계에 대응하기 위해 공급량을 늘려 유가를 낮췄는데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다. 또 코로나19 대응으로 부채가 증가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이 높은 유가를 선호해 공급을 대량으로 늘릴 유인이 줄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경파’ 이란 대통령 당선으로 원유 제재도 계속될 듯
이란 변수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제재를 받는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란과 미국의 관계가 더욱 경색될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어렵사리 시작된 이란 핵 합의 복원 논의가 또다시 암초에 부딪힌 것이다. 핵 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돼야 대(對)이란 제재가 풀려 이란산 원유가 시장에 공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란과 미국의 분위기가 지금과 같다면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세계 여덟 번째(2019년 기준) 산유국인 점을 감안하면 강경파 대통령 당선은 원유 수급난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곽윤아 기자 or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