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반드시 기억해야할 '장진호 전투'의 영웅들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햄프턴 사이즈 지음, 플래닛미디어 펴냄
체감온도 영하50도 北 장진호서
美 해병대 1사단, 중공군과 사투
목숨 바치며 압도적 병력 이겨내
'현대 전쟁사 중 가장 참혹' 평가
장진호 전투 덕에 흥남 철수도 성공
참전군 목소리 등 생생하게 담아

장진호 전투에 투입됐던 미 해병대 1사단 대원들이 1950년 11월 27일 해안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해병대는 ‘바다의 군인’이다. 해안지대를 위협해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해 투입하는 기습부대다. 가장 먼저 싸우고, 가장 먼저 죽이고, 가장 먼저 죽는다. 올리버 스미스가 이끄는 미 해병대 1사단은 한국전쟁에 갑자기 투입됐지만 엄청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사단이었다. 그럼에도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들에게 내린 지시는 스미스가 판단하기엔 무모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한 번도 한반도에 와본 적 없이 도쿄에만 머무르던 맥아더는 ‘5,000대1의 도박’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인천상륙작전을 지시했다. 인천은 상륙할 해변이 없고, 조수 간만 차는 세계에서 가장 컸으며 갯벌은 위험했다. 하지만 항명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스미스는 해병대를 이끌고 맥아더가 해상 함정 위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인천에 올라 섰다.


아시아인은 숫자에 예민하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발발 후 정확히 3개월에 맞춰 서울을 수복하라는 맥아더의 다음 지시도 스미스는 묵묵히 수행했다. 교량이 모두 파괴된 한강을 어렵게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장진호를 거쳐 압록강으로 빠르게 진격하라’는 지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그들은 해병대였다. 바다의 군인이었다. 고지를 확보한 후 좁은 길을 통과하는 험준한 산악 전투는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스미스는 직감했다. 그들 앞에는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desperate ground)’ 즉, 사지(死地)에서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6월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 국립박물관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둘러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해외 순방 첫 일정으로 이곳을 찾아 장진호 영웅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했다,/연합뉴스

신간 ‘데스퍼레이트 그라운드’는 한국전쟁은 물론 현대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참혹한 싸움 중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살아 남은 전쟁 영웅들의 목소리를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책을 쓴 미국인 역사 저술가 햄프턴 사이즈는 제목과 관련해 중국 손자(孫子)의 말을 인용한다. “전쟁터의 지형에는 아홉 가지가 있는데, 그중 마지막이자 가장 고통스러운 지형은 군대가 지체 없이 싸워야 전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도망갈 수 도 없고 쉽게 후퇴할 수 도 없는 곳이다. 적을 만나면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투를 벌이거나 항복할 수 밖에 없는 곳. 사지(死地)다.”



1950년 12월 22일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미 해병대 1사단과 보병 7사단 대원들이 부상자를 옮기고 있다./AP연합뉴스

장진호 일대는 말 그대로 사지였다. 맥아더는 압록강 진격을 명령하면서 “제군들이여,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의 호언장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혹한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겨울이었다. 영하 50도 수준의 체감 온도가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마비시켰다. 중공군은 끝도 없이 밀려 들었다. 중공군을 한 줄로 길게 쓰러뜨리면 바로 뒤에서 새로운 중공군의 물결이 밀려 들었다. 한 무리가 쓰러지면 다른 한 무리가 시체 위로 기어 나왔다. 이 기막힌 광경에 미군들은 흥분제 복용을 의심했고, 나중에는 중공군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적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스미스는 치밀하게 작전을 펼쳐야 했다.


누군가는 이들이 ‘후퇴’ 또는 ‘퇴각’했다고 너무나 가볍게 표현한다. 단순한 후퇴나 퇴각이 아니었다. 전쟁에 쉬운 선택은 없다. 이들은 뒤로 돌아 해안으로 다시 향하는 내내 압도적인 수의 적과 전투를 치러야 했다. 스미스의 질서 있는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 과정에서 밀려 오는 중공군을 막기 위해 수많은 해병대원들이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면, 10만 여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 철수 작전은 성공할 수 없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 수 도 있었다. 전투 역사가 S. L. A. 마셜은 “장진호 전투는 아마도 미국 역사상 가장 빛나는 사단급 위업일 것"이라고 평했다.




저자는 수많은 사료를 수집하고 전쟁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생존 해병대원들은 함께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해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을 대신해 죽은 것’이라며 계속 미안함을 표했고, 후세가 동료들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려 증언했다. 그 덕분에 70년 전 상황임에도 긴박감과 참혹함, 불굴의 투지와 용기, 현장 지휘관들의 빠른 결단력 등이 저자의 필력과 만나 생생하게 전달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자연스레 숙연한 마음이 든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숭고한 희생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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