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망할 여름, 희망할 여름


나는 몸과 루게릭이 손을 잡고 내 뒤통수를 치는 이 삼각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몸은 팔려가 루게릭의 앞잡이가 되었다. 내 삶 전체가 고꾸라졌다. 그래. 나는 죽을 것이다. 제비뽑기에서 망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몸이라는 배신자가 죽음을 꾸미는 수작을 지켜보지만은 않을 거다. 이제 몸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배신자에게는 최소한의 활력만 내어줄 테다. (…) 몸은 이제 내 편이 아니다. 몸이 아름답거나 추한 문제하고는 상관없다. 내 숨이 붙어 있을 몇 달간, 그저 몸이 움직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아직도 걷고 싶다. 세상 끝까지라도 걷고 싶다. (안 베르, ‘나의 마지막은, 여름’, 2019년 위즈덤하우스 펴냄)


한여름 더위와 습도에 짜증이 치받칠 때는 안 베르의 책을 읽는다. 어느 날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생애 마지막 여름을 살았던 한 여성의 기록이다. 안 베르는 근육이 점점 위축되어가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후 존엄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모국인 프랑스에서 존엄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2017년 벨기에로 넘어가 스스로 ‘생을 완성한다’.


하루가 다르게 굳어가고 죽어가는 신체와 달리, 그녀의 감각은 너무도 생생하게 여름을 느낀다. 여름 라일락, 비에 젖은 풀냄새, 사과 향기, 아무리 낮잠을 자도 떨쳐지지 않는 습도, 그리고 감옥 같은 몸. 이번 생은 제비뽑기에 실패해 망한 판이 됐지만, 그녀는 자신이 간 뒤에도 이 여름이 수없이 반복되리란 것을 안다. 죽음을 계획하면서도 여름의 냄새, 풍경, 습도를 낱낱이 기억하고 기록하는 안 베르의 마지막 여름은 그래서 치열하고 경건하다. ‘불쾌지수’를 탓하며 함부로 짜증내고 투덜거리던 마음이 한 존엄한 인간의 마지막 여름 앞에서 문득 부끄러워진다. 계절은 쳇바퀴처럼 덧없이 가고 마냥 다시 올 것 같지만, 내 생의 이 계절이 몇 번 남았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횟수는 어쩌면 생각보다 극히 적을 수도 있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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