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방의 숨김없는 싼티·날티… 소리없이 불티 난다

[심희정의 컨슈머 인사이트]
◆10조 시장으로 급성장 '라방의 세계'
소통 갈증시대…'B급 감성' 입담에 열광
펀슈머 늘어나며 자연스레 매출도 활짝
전세대 '발견형 쇼핑'이 新 소비트렌드로
일반인부터 연예인·장관까지 쇼호스트
네이버·배민·11번가 '라방' 대박 릴레이
부동산·車 등 전문 플랫폼도 등장 조짐
"메타버스 융합 가속…오프라인 제칠 것"







“메타버스를 활용한 가상공간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구경하며 프랑스 브랜드 옷을 사는 시대가 머지않아 올 거랍니다. 유럽 직수입 제품을 판매할 때 유럽의 한 시가지를 구현한다거나 아파트 분양 방송을 하면서 증강현실(AR)로 시공 중인 아파트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등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쇼핑라이브 관계자)


한국의 라이브커머스(라방)가 정보기술(IT) 강국을 기반으로 고도화된 라이브 기술과 온라인스토어를 통해 확보된 상품들, 무궁무진한 기획 콘텐츠 등을 무기로 한 라방 플랫폼들 간의 불꽃 튀는 전쟁으로 한국 유통과 소비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다. 비대면 경제 시대를 살면서 소통에 목 말랐던 사람들은 라방의 진솔하고 담백한 B급 감성 대화법에 열광하고 있다. 나이·학벌·스펙을 불문하고 라방 쇼호스트가 인스타그래머·유튜버에 이어 새로운 직종으로 각광 받는 가운데 최근 어부, 파티셰, 영어 선생님, 부총리와 장관까지 라방에 등장하며 대한민국은 라방에 푹 빠져 있다. 서용국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라방 판매자나 구매자층에 그동안 핵심 소비층으로 여겨온 MZ세대뿐 아니라 소비력을 갖춘 50~60대까지 합류하면서 라방 구매의 즉흥적 소비와 발견형 쇼핑이 소비 시장의 트렌드를 새롭게 이끌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술과 콘텐츠 앞세운 라방 춘추전국시대=지난 5월 네이버 쇼핑라이브 ‘나이키에어디올 편’에서는 1,000만 원짜리 나이키 한정판 스니커즈가 시작과 동시에 판매되며 솔드아웃됐다. 다이슨코리아 기획전에서는 90분 만에 23억 원어치가 팔렸고 삼성전자 청소기 라방은 90만 뷰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네이버에 입점한 스마트스토어 판매자 증가율은 지난해 론칭 시점인 8월 대비 올해 5월 현재 1,300% 증가했고 거래액 규모 또한 2,400%나 늘었다. ‘작은 거인들’의 파워를 확인한 네이버는 며칠 전 라방 자격 요건을 파격적으로 낮췄다. 과거에는 ‘파워 등급(최근 3개월 누적 판매 건수 300건, 800만 원)’에 해당하는 스마트스토어 판매자만 라방을 진행할 수 있도록 했지만 최근 ‘새싹(100건, 200만 원) 등급’으로 허들을 낮춰 보다 많은 셀러들의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카카오는 카카오 쇼핑라이브를 운영 중인 카카오커머스를 분사한 지 4년 만인 오는 9월 1일 흡수해 라방에 전사적인 역량을 쏟기로 했다. 하루 5회가량 완성도 높은 ‘고퀄 방송’을 진행한 덕분에 방송당 시청 횟수는 14만여 회, 평균 거래액 1억 원 이상, 최대 10억 원이 넘는 성적을 자랑한다.


배달의민족도 B급 감성과 재치 있는 마케팅 노하우가 축적돼 중독성 있는 기획 콘텐츠로 방송당 평균 6만여 회의 시청 수를 기록하고 있다. 가을부터는 셀러가 직접 방송을 제작하는 횟수를 늘려나갈 계획이다. 라방으로 판로도 확보해 야심 차게 가정 간편식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첫선을 보인 ‘배민의발견’ 1호 제품 ‘팔백집 쫄갈비’가 대히트하면서 다음 달 초 2호 제품도 내놓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11번가가 운영하는 ‘라이브11’은 최근 쇼핑과 예능을 결합한 쇼퍼테인먼트 코너를 신설해 고객들의 갈증과 니즈를 채워주는 대리만족형 콘텐츠로 MZ세대의 지갑을 활짝 열고 있다.


◇ 라방에 빠진 사람들 “날것, B급 감성이 좋다”=싱글남 이 모(39) 씨는 퇴근 후 TV 대신 라방을 틀고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낸다. 딱히 구매할 품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평소 좋아하는 개그맨이 나오면 채팅으로 질문하고 그가 전하는 정보를 즐기며 어느새 ‘라방 인싸’가 됐다. “코로나19로 저녁 약속이 현저히 줄어든 탓에 집에서 혼자 라방을 시청하며 저녁 식사를 한다”는 이 씨는 “라방을 보면 심심한 것도, 외로운 것도 잊게 된다”며 “가끔은 생각지 않았던 HMR 제품을 사기도 하고 어느 새 올인원 화장품을 구매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여파로 사람들이 소통에 갈증을 느끼는 가운데 날것의 B급 감성이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있다. 어설프지만 오히려 진솔해 소비자들은 마음과 더불어 지갑을 여는 것이다. 라방에서나 만날 수 있는 배 위에서 고기 잡는 어부, 지리산에서 꿀 따는 농부, 맛의 비법을 알려주는 셰프, 현란한 입담의 개그맨, 30년간 전통시장을 지킨 상인 등 옆집 아주머니, 앞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의 수식어 없는 입담은 가장 큰 재미 요소다. 라방을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한 단어에 꽂히면 들어가 사는 이들도 늘고 있다. 작정하고 쇼핑하는 ‘계획형 쇼핑’ ‘기획성 소비’가 아니라 콘텐츠에 빠져들면서 지갑을 여는 ‘발견형 쇼핑’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라방에 빠진 쇼호스트 지망생들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아나운서, 기상 캐스터, TV 리포터 등 방송인을 양성하는 ‘방송 아카데미’ 학원들은 앞다퉈 ‘라이브커머스진행자반’을 신설하고 있다. 천우정 김효석쇼호스트아카데미 부원장은 “아나운서나 TV 홈쇼핑처럼 지상파 채널의 방송인은 나이·스펙 등의 제한이 있는 반면 라방 진행자는 남녀노소를 구분 짓지 않고 문턱이 낮아 40~50대 수강생들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부동산·명품·자동차 등 전문 버티컬커머스 플랫폼 등장하나=식품·패션·인테리어·아트·뷰티·부동산·명품·자동차 등 특정한 카테고리의 제품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버티컬커머스 플랫폼도 머지않아 쏟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음식 라방계의 유일한 채널인 배달의민족 ‘쇼핑라이브’는 방송당 억 단위의 매출을 올리며 식품 라방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다. 5월 21일 총 2만 장을 준비한 ‘BBQ치킨’ 상품권은 4억 원어치가 완판됐다. 2일에는 인기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가 프레시지와 컬래버한 비빔국수&간장국수 세트 상품이 방송 1분 만에 모두 팔렸다. 패션을 특화한 무신사 라이브는 5월 반스 라이브 방송에서 단일 브랜드로만 1시간 동안 5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입점 브랜드와 손잡고 콘텐츠를 기획하고 패션 전문가, 패션 인플루언서, 모델, 에디터 등의 진행으로 전문성을 높인 라방은 누적 접속자 수가 20만 명에 달하며 11월까지 방송 스케줄이 모두 잡혔다.


이로써 종합 e커머스 라방과 버티컬 라방 간의 전면전도 예상된다. 여기에 방송국 개념의 라방 채널들이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 김도연 굿즈컴퍼니 대표는 “커머스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와 라방 플랫폼 간의 합종연횡도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미 유한익 전 티몬 대표는 연말 아모레퍼시픽과 F&F·매일유업 등이 주주인 라방 전문 플랫폼 탄생을 예고했다. 그는 “브랜드와 제조사들이 플랫폼들을 옮겨 다니며 라방을 진행하고 있는데 방송을 통한 지속가능한 소통을 위해 플랫폼 내에 그들만의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너도 나도 쇼호스트…신생 브랜드 “하나도 안 팔려도 그 자체로 광고”=전문 판매자 외에 일반인 셀러들도 라방 쇼호스트로 나서고 있다. 라방 전문 플랫폼 그립에서는 전문 판매자보다 소상공인이나 주부·학생 등 일반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동대문시장에서 마스크와 양말을 파는 50대 후반의 한 남자 사장은 “매장에서 손님을 기다려는 것보다 종일 라이브를 켜놓고 있는 것이 훨씬 물건도 많이 팔고 재밌기도 하다”며 “말하는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손님들이 물어보는 것을 대답해주고 보여주면 되더라”라고 말했다. 라방은 소비자를 판매자로 만들기도 하며 소비자와 판매자의 경계도 무너뜨리고 있다. 한 40대 여성은 자신이 쓰던 목욕용품이 좋아 직접 벤더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그립의 라방 서비스를 이용해 욕실에 제품을 진열해놓고 욕조에 거품을 풀어내며 입담을 늘어놓았다.


전문 쇼호스트와 셀렙들을 기용한 대형 브랜드들은 이미 라방을 통해 재미를 톡톡히 봤지만 규모가 작은 신생 브랜드의 경우 라방을 브랜드 광고 및 판매 창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신생 브랜드가 이름을 알리기 위해 홈쇼핑을 선택할 경우 방송 1회 제작비는 1억 원 수준이며 수수료도 50%에 달한다. 반면 라방은 플랫폼과 출연자, 상품만 있으면 된다. 네이버나 카카오커머스 등과 같은 라방 플랫폼과 콘텐츠를 제작해도 홈쇼핑보다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홈쇼핑 문을 두드렸다가 신생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한 한 신규 뷰티 브랜드 대표는 “갓 태어난 브랜드도 라방이라는 창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큰돈을 들여 광고하지 않아도 매주 꾸준히 기다리는 단골 시청자를 늘려가며 브랜드의 스토리텔링을 해나갈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라방, 그 이후=e커머스 업계에서는 라방 플랫폼이야말로 오프라인의 벽을 뛰어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라고 자신한다. e커머스가 오프라인 플랫폼을 실질적으로 능가하지 못하는 한계가 소통의 문제였지만 라방을 통해 이를 극복하게 됐기 때문이다. 쌍방향 소통으로 언제든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어 오프라인 경험을 온라인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한국의 라방은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접목해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직접 쇼핑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 대표는 “한국의 라방이 인근 아시아 국가에도 송출될 경우 이미 코로나19로 물류 발달이 가속화된 만큼 국경을 넘어 일본·중국·동남아 등 아시아권의 거대한 라방 시장이 탄생할 공산도 크다”고 내다봤다. /심희정 라이프스타일 전문기자 yvett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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