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K-IFRS 10년 됐는데…회계기준 애매모호, 기업들 문의 4년새 두배나 껑충

[도입 10년, 갈피 못 잡는 K-IFRS]
작년 회계기준원에 질의 184건
당국 과거 규제 중심 관행 여전
회계 법인·기업들 눈치보기 급급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이 우리나라에 전면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논란이 크다. 특히 기업·회계법인들은 과거의 규제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감독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는 지적이다. K-IFRS 시행 이후 제재를 피하기 위해 한국회계기준원 등 ‘권위 있는’ 기관에 미리 회계 해석을 묻는 기업도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26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위원회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K-IFRS 해석·처리와 관련해 기준원이 접수한 질의 건수(정규 절차 질의 기준)는 총 184건에 달했다. 이는 전년보다 35.3% 증가한 것이며 4년 전인 지난 2017년(86건)의 2.1배에 달한다. 당국의 징계를 피하기 위해 미리 자사의 회계 처리가 적절한지를 물어보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2011년 전체 상장사에 K-IFRS를 전면 적용했다. K-IFRS는 기본 ‘원칙’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회계 처리는 기업의 재량에 맡긴다. 기존 일반기업회계기준(K-GAAP)에서 재무제표 작성 방법을 일일이 규정하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감독 당국이 “K-GAAP 시절의 규제 중심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는 추상적인 원칙만 제공하는 K-IFRS의 성격과 뒤섞여 기업들의 회계 처리를 더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다. 한종수 이화여대 교수(전 IFRS해석위원회 위원)는 “우리나라의 회계는 원칙 중심인데 감독은 규정 중심”이라며 “회계 처리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예방 중심 감독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재량권 커녕…난해한 기준에 "자칫 분식회계 될라" 노심초사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은 20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회계 업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주요 쟁점은 지난 2015 회계연도 재무제표에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처리한 것이 적절했느냐다. 삼바는 미국 제약사 바이오젠에 에피스 주식을 ‘50%-1주’까지 사들일 수 있는 콜옵션을 제공했다. 이후 삼바는 2015사업연도 바이오젠이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에피스를 관계회사로 처리했다. 비록 지분은 50% 이상 갖고 있지만 “옵션 행사 시 바이오젠이 이사회 구성원의 50%를 선임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던 만큼 삼바에 ‘실질적인 지배력’이 없다고 해석한 것이다.


금융감독원과 검찰은 이 과정에서 삼바가 에피스 보유 주식을 지분법을 통해 4조 5,000억 원의 공정가치로 평가한 것을 두고 고의적 회계기준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국이 과잉 대응했다는 논박도 만만찮다. ‘경제적 실질은 기업이 가장 잘 안다’는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의 기본 철학을 고려하면 에피스에 대한 관계회사 처리 여부는 삼바가 자유롭게 판단할 사안이었다는 의미다.


삼바 사례는 올해 국내에 도입된 지 10년이 된 K-IFRS 체제에서 ‘분식회계’ 여부를 규정하고 벌을 내리기 난해하다는 점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감독 당국 입장에선 기업 경영·계약이 고도화하면서 분식회계를 입증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반면 기업·감사인은 K-IFRS의 추상적이고 복잡한 조문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당국을 ‘강성’이라고 전제하고 제재를 피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질의회신’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26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위원회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한국회계기준원이 접수한 사실판단 질의 건수(정규 절차 질의 기준)는 지난해 총 81건이었다. 전년보다 55.7%나 늘어났다. 올해 1~6월에도 총 35건의 사실판단 질의가 기준원에 들어와 2017년(25건) 수준을 훌쩍 넘었다. 올해 상반기에 들어온 전체 정규 절차 질의(51건) 10건 중 7건은 사실판단 질의인 셈이다. 사실판단 질의란 특정 상황에서 해당 회계 처리를 하는 게 맞는지 물어보는 것을 뜻한다.


K-IFRS는 지난 2011년 세계화 추세에 맞춰 전 세계 150여 개 국가에서 활용하는 국제회계기준(IFRS)을 우리나라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면서 도입됐다. 회계 처리 방식을 일일이 정해줬던 일반기업회계기준(K-GAAP)과 달리 일반적인 ‘원칙’만 제공하고 구체적인 회계 처리는 ‘기업의 재량’에 맡기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른바 ‘원칙 중심 회계’다.


그러나 K-IFRS의 성격을 고려하면 사실판단 질의 증가 추세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진단이 나온다. 애초에 K-IFRS는 자신의 정보를 가장 잘 아는 기업에 경제적 실질을 잘 반영하라고 재량권을 보장해주고 있는데 오히려 기준원에 “이 경우 이 회계 처리가 맞냐”고 물어보는 셈이기 때문이다. 한종수 이화여대 경영대학 교수는 “사실판단은 각 기업이 맡고 감사인은 이것의 적정성을 검토하는 것이 타당하지 기준원이 이에 대답을 해줄 사안은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이처럼 사실판단 질의가 늘어나는 배경엔 회계기준의 모호함과 복잡성이 있다. K-IFRS는 ‘원칙’만 제시하는데 기업 경영은 어려워지고 각종 파생 계약은 늘어나면서 기업·감사인들이 회계 처리에 곤혹스러운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의 재무 담당자는 “원칙 중심의 회계기준으로 인해 회계 처리에 재량권이 부여되기는 하나 오히려 기업들 입장에서는 회계기준 해석·적용상의 모호함을 토로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회계기준 해석상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서도 감독 당국의 제재가 부각되면서 더더욱 회계기준원의 ‘권위’에 호소하는 사례가 늘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한번 감독 당국으로부터 회계기준 위반 판단을 받으면 검찰 고발, 임원 해임, 나아가 상장폐지까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인들도 감독 당국으로부터 과징금, 감사 제한 등의 패널티를 받게 된다.


여기엔 감독 당국에 대한 기업·회계법인의 불신이 깔려 있다. 감독 당국이 감리·제재 처리 건수를 일종의 ‘실적’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K-IFRS에 대한 감독 당국의 전문성을 꼬집는 목소리도 나온다. 자신의 회계 처리가 타당하다고 ‘증빙’하기 위해 다른 회계법인과 회계자문(PA) 계약을 맺거나 회계학 교수의 의견서를 받아오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 대형 회계법인 임원은 “감사 보고서 내 문구만 갖고 트집을 잡는 경우도 꽤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감독 정책은 회계 처리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최종적 판단이 달리는 사안인데 여기서 잘못되면 앞서 감사인·기업의 노력이 다 흔들리게 된다”며 “이전엔 감독 당국이 성악설에 근거했다면 이제는 성선설로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핵심 규제를 분명히 제시하고 충분한 사례와 해설 자료를 작성해 회계기준 적용상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K-IFRS의 ‘원칙 중심 회계’가 역으로 기업·감사인의 징계 회피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가령 회사 입장에서 회계상 타당한 A안을 제쳐놓고 자신의 입장에서 B안으로 회계 처리를 한 뒤 “원칙 중심 회계를 존중하라”고 감독 당국에 우길 수 있다는 의미다.


전직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본인에게 불리하면 원칙 중심 회계를 적용하는 식의 일종의 ‘체리피킹’이 너무 많다”며 “원칙 중심 회계를 하면 모든 재무제표가 모든 투자자에게 유용하게 제공될 것이라는 성선설이 있지만 이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