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사는 미래기술 먹어치우는데…현금 112兆 쥐고 쳐다만 보는 삼성

[코너 몰린 K주력산업]
<1>위기의 삼성-(하)멈춰버린 투자시계
MS·엔비디아·인텔 등 메가톤급 인수로 신사업 탑재
삼성은 5년간 M&A '제로'…하만 이후 한발짝도 못떼
"리더십 공백 탓…주춤하다 성장DNA 잃는다" 경고등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 4월 인공지능(AI) 음성인식 기업 뉘앙스를 197억 달러(약 22조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뉘앙스는 애플의 음성인식 엔진인 시리를 개발한 기업이다. 이를 통해 MS는 자사 클라우드 서비스에 음성인식 기술을 이식하고 헬스케어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때 구글·애플 등 빅테크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던 MS는 이처럼 과감한 인수합병(M&A)과 사업 재편을 통해 투자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지난 6월 미국 상장사 중 두 번째로 시가총액 2조 달러를 돌파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물론 국내 주요 그룹들도 코로나19 이후 달라질 산업 지형을 공략하기 위해 M&A 전쟁을 벌이고 있다. 반도체 업계 역시 사물인터넷(IoT)과 자율주행 기술 등이 떠오르며 새로운 칩 개발을 위한 업체 간 합종연횡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하지만 글로벌 산업의 격변기에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의 M&A와 사업 재편이 수년 째 멈춰 있어 위기의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2016년 미국 하만 인수 이후 이재용 부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휘말리면서 삼성이 의미 있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분기 기준 삼성이 쌓아둔 현금성 자산만 무려 112조 원에 달한다. 재계에서는 “풍부한 자산에도 불구하고 삼성이라는 기업 자체가 성장의 유전자(DNA)를 잃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삼성이 정체된 동안 글로벌 경쟁사들이 무섭게 덩치를 키우고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만 해도 최근 인텔의 글로벌 파운드리 인수 추진 사실이 알려졌고 지난해 말에는 미국 시스템 반도체 기업 마벨테크놀로지가 경쟁사인 인파이를 인수했다. 직전에는 미국 엔비디아가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회사인 영국 ARM을 400억 달러에 거머쥐었다. 인텔은 특히 오는 2024년 2㎚(나노미터·10억 분의 1m) 수준의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계획까지 공개하며 파운드리 분야에서 삼성을 무섭게 따라잡을 기세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전자의 매출은 사실상 수년간 정체돼 있다”면서 “반면 경쟁사인 애플은 내부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 유망한 스타트업 M&A 등을 추진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 역시 내부적으로는 신사업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해왔다. 이 부회장은 2018년 AI, 5G, 전장용 반도체, 바이오를 ‘4대 미래 성장 사업’으로 지정하고 3년간 총 25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이후 삼성은 전 세계 곳곳에 글로벌 AI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세계 최대 통신사인 미국 버라이즌과 5세대(5G) 통신 계약을 체결하는 등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중기 투자가 마무리된 현재 리더십 부재인 삼성은 그간의 투자 전략을 되짚어보고 새로운 성장 엔진을 탑재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삼성의 모습은 최근 2~3년간 국내 다른 그룹들의 움직임과도 확연히 비교된다. 총수가 사업 재편을 진두지휘하는 현대자동차·SK·LG 등은 눈코 뜰 새 없이 사업을 재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로봇 기술 업체인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절차를 마무리 지었으며 미국 앱티브와는 자율주행 합작 법인 ‘모셔널’을 설립했다. SK는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플래시사업부를 인수했고 SK이노베이션이 미국 포드와 합작사를 세우기로 했다. LG 역시 차량용 조명 기업 ZKW를 인수하는가 하면 세계 3위 전장 업체인 캐나다의 마그나와 합작사를 가동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40~50대 젊은 총수들이 각자의 경영 색깔을 확연히 드러내는 데 반해 사업 재편을 결정할 주체가 없는 삼성은 리더십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의 신사업 DNA를 복구하려면 결국 이 부회장의 빠른 경영 복귀가 급선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예전처럼 총수가 모든 경영에 관여하는 시대는 지나갔으나 조 단위 M&A, 계열사 매각, 과감한 외부 인사 영입 등은 전문경영인이 결정하기 힘든 영역이기 때문이다. 삼성 내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삼성에는 1990년대 AST 인수 후 경영 실패 경험 등으로 M&A에 지나치게 신중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면서 “누군가는 이걸 깨야 하고 결국 그 숙제는 이 부회장이 맡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동시에 인수 후 통합(PMI) 등에서도 삼성만의 성공 모델을 만들어야 할 때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당장 이 부회장이 주도적으로 인수한 전장 기업 하만과의 시너지 창출 역시 시급한 과제다. 이 교수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 시점”이라며 “적극적인 M&A를 해야 삼성이 성장동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