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통과되는 것처럼 보였던 실손의료보험(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법안이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관련 법안 발의가 잇따른 데다가 시민단체 등이 가세하며 공감대를 얻었지만 의료계의 반발로 다시 잠잠해진 모습이다. 이 가운데 선진국에서는 민영 건강보험 청구 전산화를 통해 소비자들이 간편하게 보험금을 지급받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실손 청구 간소화가 조속히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일 보험업계와 국회에 따르면 지난 6월과 7월 국회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상태”라며 “8월 임시국회가 열릴 가능성도 남아있고 9월 정기국회 이후에도 관련 논의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 가입자가 병원 진료 후 보험금을 받기 위해 관련 자료를 의료기관에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관련 자료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 전산망을 통해 보험업계로 전송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현재 가입자들은 의료기관에서 직접 종이서류를 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 12년째 관련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보험업계는 국민 편의 증가 및 보험금 지급 간편화로 운용비용을 줄이고 디지털 전환을 앞당길 수 있는 만큼 찬성하고 있지만 의료계에서는 반대 입장이 크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은 올해 5월 무렵에는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여당에서 고용진·전재수·김병욱·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그리고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까지 21대 국회에서만 다섯번째 법안이 나왔다. 금융소비자단체들도 소비자의 편익 증가에 도움이 되는 만큼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관련 국회 공청회·토론회도 이어졌다. 하지만 6월 초 열린 국회 토론회에서 의료계가 반대 입장을 강하게 내비치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의료계에서는 환자 의료기록 유출 및 심평원과 보험사의 의료 데이터 악용 가능성 등을 이유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보험 비급여 항목의 통제가 강화돼 병원 수익성이 악화할 수 있다는 게 의료계 반발의 본질이라는 것이 보험업계의 주장이다.
이 가운데 프랑스와 영국은 민영 건강보험 청구 전산화를 통해 보험가입자·의료기관·보험사 모두 편익이 높아진 만큼 국내에도 적극적인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보험연구원은 최근 ‘해외 민영 건강보험의 청구전산화 사례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프랑스는 ‘의료기관-중계기관(건강보험공단)-보험사’ 간 전자정보전송시스템을 통해 보험금을 청구하는 형식이다. 보험가입자가 병원에서 진료비 전액을 정산한 뒤 건강보험카드를 제시하면 병원에서 전자정보전송시스템을 통해 진료차트를 중계기관인 건강보험공단에 전송한다. 건강보험공단은 전자정보전송시스템 사용에 대해 계약 관계를 맺은 보험사를 대상으로 보험가입자의 전자청구서를 전송하고, 전자청구서를 전송받은 보험사는 통상 48시간 이내에 보험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게 된다.
영국의 경우 병원이 보험가입자의 진료 후 ‘병원-중계기관(중간결제회사)-보험사’ 간 전자정보전송시스템을 통해 보험사에게 보험금을 직접 청구해 지급받고 있다. 중계기관은 병원으로부터 받은 전자청구서의 유효성을 테스트한 후 보험사에 최종전송하게 되며, 보험사는 중간결제회사로부터 받은 전자청구서를 심사한 후 의료기관에 보험금을 지급한다. 중계기관은 영국 최대 건강보험회사인 ‘부파’(Bupa) 추진으로 2000년에 설립됐는데, 설립 이후 현재까지 정보유출 사건이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류방식을 통해서 정보유출 문제가 더 심각했다. 영국 정보위원회(ICO)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1분기 의료부문의 정보유출(420건) 중 비전자 방식으로 의한 건이 90%(380건) 이상을 차지했다.
정성희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대부분의 국민이 실손의료보험을 가입하고 있고, 연간 청구 건도 1억건 이상인 점을 고려할 때 실손보험청구 간소화는 사회적 편익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