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플랜트 기업 A 사 연구원은 지난 2018년 퇴직하면서 A 사뿐만 아니라 A 사 협력 업체의 ‘대기오염 방지 설비 자료’ 기술 및 영업 자료를 USB로 무단 반출해 중국 업체에 판매하려 했다. 이 기술이 중국에 유출됐다면 국내 상당수 중소기업들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법원에서 이 연구원에 대한 판결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에 그쳤다. 기술 유출 시 국내 산업 생태계에 끼칠 부작용을 고려할 때 처벌은 ‘솜방망이’라는 것이 기업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산업계에서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구도 속에서 우리 기술과 인력 유출을 완벽하게 차단할수는 없겠으나 △기술 유출 범죄 양형 기준 상향 △기술 인력 퇴직 생태계 마련 △경쟁국과의 투명한 협업 등을 통해 예방 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유죄 20건 중 실형 3건 불과
현행 산업기술보호법상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최고 형량은 ‘3년 이상의 유기 징역(국가핵심기술 해외유출)’이다. 하지만 실제 법원의 양형 기준은 이게 크게 못 미친다.
대법원 양형 기준에 따르면 기술 국외 유출 적발 시 ‘이익 미실현’이나 ‘초범’ 등의 감경 사유가 적용될 경우 통상 10개월~1년 6개월의 형이 선고된다. 집행유예 요건을 충족하는 셈이다. 실제 2020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7~2019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1심 기준)된 20건의 사건 중 실형은 3건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산업계에서는 법원이 근본적으로 양형 기준을 높이지 않을 경우 기술 유출 범죄는 더 늘어나고 교묘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B 대기업 기술 담당 임원은 “기술 유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범죄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는 직원들도 많이 봤다”면서 “강력한 처벌이 있어야 기업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경각심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퇴직 기술인력 활용방안 절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굵직한 국내 메모리 반도체 제조사에서 고위 임원을 담당한 최진석 진세미 사장은 중국에서 D램 공장 가동을 준비 중이다. 현재 진세미에는 300여 명 이상의 임직원이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중 대부분은 국내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이다. 기존 한국 업체에서 설 자리가 크게 좁아지면서 이 회사로 이직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핵심 정보기술(IT) 유출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들의 중국행이 생계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승진 실패나 회사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 퇴직을 했을 때 이들이 새롭게 둥지를 틀 만한 곳이 마땅찮아 갖은 비판을 감수하며 해외로 빠져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에서 최고급 기술을 연구했던 사람들이라도 퇴직 후에 남은 선택지는 사업장 앞에 식당을 차리는 방법밖에 없다”며 “이들의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인사 시스템을 정비해야 겠지만 국가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가 고급 반도체·디스플레이 인재들을 흡수할 수 있는 싱크탱크 형태의 국가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로 거론된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자들이 퇴임 이후 기술을 전수하면서 공무원 지위도 얻을 수 있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어 인력 선순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우리 문화를 문화재로 보전하는 것처럼 우리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핵심 인력에게 다양한 혜택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쟁 국가·기업과 동반 성장 모델 필요
경쟁 국가나 기업과 투명한 상생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각 기업이 핵심 인력은 철저하게 보호하되 재취업 기회가 필요한 인력들은 해외에서도 자유롭게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오히려 글로벌 인력 시장을 유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등 경쟁 국가와도 기술과 인력 협력이 필요한 부분은 투명하게 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국 시장 전문가인 허성무 KOTRA 해외지재권실 차장은 “물과 마찬가지로 기술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며 “이웃 국가 산업이 발전해야 우리 부품 수출도 늘어나는데 ‘사다리 걷어차기’ 위주 정책은 이웃 국가의 경쟁심만 부추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 차장은 “일정 부분에서 협업 가능성을 열어두고 함께 발전하는 모델을 만들어가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유출’이 아닌 ‘계획된 협업’을 통해 인력을 보호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