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육지 끝자락서, 바다 건너 제주를 만나다

■장흥 천관산 구룡봉 등반
천관산에서 제주도까지 직선거리로 110km
'진짜 보일까' 의심도 잠시, 가파른 경사 따라
정상에 오르면 다도해 사이로 제주가 한 눈에
'이천년고찰 탑산사' 기암괴석에 감탄사 연발
내려오며 '편백숲우드랜드'선 숲멍으로 힐링

천관산 여름 산행의 묘미는 계곡이나 폭포가 아닌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풍광이다. 사진은 천관산 구룡봉 정상에 오른 한 등반객이 암각문을 살펴보는 모습이다.

무더위가 절정인 여름의 한복판, 육지 끝자락인 전남 장흥까지 찾아간 것은 과연 천관산에서 제주도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지난 3월 문화재청은 천관산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하면서 ‘다도해 경관 사이로 제주도가 조망된다’는 점을 지정 사유 중 하나로 언급한 바 있다.


천관산에서 제주도까지는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도 110㎞ 남짓이다. 지금은 뱃길이 끊겼지만 장흥 노력항에서 제주 성산항으로 오가던 쾌속선을 타고도 2시간 20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거리다. 해발 724m에 불과한 산 정상에서 아무리 시계(視界)가 확보된다고 해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마치 ‘부산 송도에서 대마도가 보인다’거나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 정도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렸다.


전국의 이름난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지역민들로부터 “날이 좋을 때 왔으면…”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던 터라 유독 맑은 하늘이 이어지던 7월 말에 작정하고 천관산으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천관산에서 본 것은 제주도뿐만이 아니었다. 막상 정상에 올라서니 제주도를 보러 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다도해를 조망하기 좋은 위치는 천관산에서도 연화대와 구룡봉 두 곳이다. 목적이 등산이 아니라 제주도 조망이기 때문에 구룡봉으로 가는 최단거리 코스를 골랐다. 탑산사 주차장을 찾아가면 천관산문학공원을 지나 정상까지 절반을 차로 올라갈 수 있다. 목적지까지는 총 1.2㎞, 걸어서 왕복 2시간 30분 거리다. 다만 최단거리 코스인 만큼 정상까지 가파른 경사를 쉼 없이 올라야 한다.



가을 억새로 유명한 천관산은 여름이면 등반객이 크게 줄어 휴식기에 들어간다.

본격적인 산행은 탑산사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좁은 등산로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서면 가파른 자갈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초반에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머리 위로 쨍한 하늘이 드러났다. 첫 번째 갈래 길은 반야굴. 커다란 바위 아래 불상을 모셔두고 수도승들이 머물던 수행 공간이다. 천관산이 고려시대 89개 암자를 거느린 ‘한국 불교의 태동지’였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다.



탑산사는 한국 불교 태동지인 천관산을 천 년 넘게 지키고 있는 대표 사찰이다.

바로 위는 탑산사다. 해발 600m 고지에 자리 잡은 사찰은 명성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아담한 산중암자다. 문헌상 신라시대 승려 통령(通靈)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의 시문선집 ‘동문선’에 실린 ‘천관산기(天冠山記)’의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233년 세워진 한반도 최초의 사찰이라는 설이 제기됐다. 이 때문에 탑산사는 천년고찰이 아니라 ‘이천년고찰’로 불리기도 한다.



마치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올라가는 듯한 천관산 구룡봉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관문. 한 등반객이 좁은 바위틈으로 난 길을 통과하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신없이 산을 오르느라 놓친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주변으로 거북바위·사자바위·종바위 같은 다양한 형상을 한 기암괴석들이 봉우리마다 솟아 있고 그 너머로 다도해 풍경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아육왕탑. 바람에 쓰러질 듯 위태롭지만 수천 년간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사찰 바로 옆은 아육왕탑이 지키고 있다. 주사위나 공깃돌 모양의 바위 다섯 개를 차곡차곡 포개놓은 형태의 이 탑은 인도의 아육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불탑이다. 자연이 빚어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다. 아육왕탑 아래로는 탑산사 부속 암자인 의상암터다.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곳으로 대웅전이 들어설 만큼의 넓은 터 곳곳에서 오래전 사찰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홉 마리의 용이 놀다 갔다는 구룡봉 정산에는 평평한 바위 위에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나 있다.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웅덩이에는 용 대신 개구리가 살고 있다.

최종 목적지인 구룡봉은 탑산사에서 200m 거리다. 구룡봉은 너른 바위 위에 둥글게 패인 물웅덩이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웅덩이마다 고인 물은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정상에 올라서면 일단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이 순식간에 마를 정도로 강한 바람부터 만난다. 바위 위에 앉아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제야 대덕읍과 회진면에 걸쳐 넓게 펼쳐진 들판과 수평선 따라 그 뒤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다도해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나무 형상을 한 진죽봉이 삐죽삐죽 솟아 있고 그 사이로 하늘의 기둥을 깎아 세워둔 모양이라는 천주봉 등 온갖 형상을 한 기암괴석들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아육왕탑 위에서는 장흥 회진면과 대덕읍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이날 다도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던 섬이 제주도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앞에는 약산도·모황도·청산도·여서도 같은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가로막고 서 있고 그 뒤로는 구름에 가려 어디쯤이 제주도인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육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김녕항이나 월정리해수욕장 언저리다. 혹시라도 천관산에서 봤던 구름 아래 어딘가가 제주도였다면 아마 한라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해볼 뿐이다.



구룡봉에 오른 등반객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땀을 식히고 있다.

꼭 제주도 조망이 아니더라도 천관산을 찾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어느 방향으로 올라가도 능선을 타고 오르면 기암괴석과 함께 다도해 경관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룡봉에서 능선을 따라 환희대~연대봉~장천재로 넘어가거나 연대봉에서 수동마을 갈림길을 거쳐 거북바위·천관문학관으로 곧장 내려갈 수도 있다.


주변으로도 다양한 볼거리들이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시설이 천관산 기슭에 자리한 천관문학관이다. 소설 ‘녹두장군’의 송기숙, 아동문학가 김녹촌, 차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승우까지 장흥 출신 작가들의 전시물이 가득하다.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청준과 한승원의 자료들을 둘러보며 두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이외에도 600여 기의 자연석 돌탑과 전국 유명 문학 작가의 문학비로 조성된 천관산문학공원, 장흥 위씨 집성촌인 방촌마을, 동백숲과 비자림으로 유명한 천관산자연휴양림도 하산 길에 들러볼 만한 곳들이다.



‘정남진편백숲우드랜드’는 억불산 기슭의 편백나무 숲속에 위치해 있다. 사진은 우드랜드 방문객들이 해먹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고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숲속에서 상쾌한 피톤치드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방법도 있다. ‘정남진편백숲우드랜드’는 40년생 이상의 아름드리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100㏊ 규모의 휴양림이다. 생태 건축을 체험할 수 있는 목재 문화 체험관, 목공 및 생태 건축 체험장, 숲 치유의 장, 산야초 단지, 말레길, 편백 소금 찜질방 등 다양한 시설과 숲 치유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통나무 주택, 황토 주택, 한옥 등 숲속에 마련된 숙박 시설에 하루나 이틀 머물면서 ‘숲멍’을 즐기기에 최적화된 코로나19 여행지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