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이 발표된 9일 오후, 긴장감 속에서 법무부의 결정을 기다리던 삼성 임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했던 ‘특별 사면’은 아니었지만 이 부회장의 출소 자체가 삼성 안팎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이날 법무부가 가석방의 취지로 ‘글로벌 경제 환경’을 강조한 만큼 이 부회장의 경영 활동 족쇄를 풀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9일 재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이 부회장의 가석방 결정은 ‘반도체 패권 전쟁’ 등 글로벌 시장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청와대와 정부의 판단이 상당 부분 작용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4대 그룹 총수 오찬 간담회에서 이 부회장 사면을 요청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고충을 알고 있다.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화답한 바 있다.
재계가 그동안 강력히 요청한 특별사면은 아니지만 이번 가석방 결정에도 미중 반도체 공급망 개편 등 시급한 글로벌 현안에 대한 정부의 위기감이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도 이날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제 침체, 글로벌 경제 환경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국가 경제와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이번 가석방의 배경이 된 만큼 취업제한이나 해외 출장 금지 등 경영 활동에 지장이 되는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도 이날 “해외 파트너 미팅, 글로벌 현장 방문 등 경영 활동 관련 규제를 관계 부처가 유연하게 적용해달라”고 정부 측에 요청했다.
재계는 현금성 자산만도 무려 112조 원에 달하는 삼성의 투자 시계가 이 부회장 출소를 계기로 다시 빨라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앞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문 대통령과의 4대 그룹 오찬 간담회에서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조 단위 투자 결정은 결국 총수의 몫”이라면서 “이 부회장이 직접 결정해야 할 삼성 계열사들의 투자나 합작 건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에게 당면한 최대 현안은 삼성전자의 미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 추가 설립과 삼성SDI의 미국 진출 등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5월 말 미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추가 설립하겠다고 밝혔으나 후보지 선정이 여전히 안갯속이다. 미국 정부의 세제 혜택 등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막바지 협상 과정 중에 있다지만 일각에서는 TSMC나 인텔 등 경쟁 업체들과 비교해 투자 시기를 놓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아울러 LG와 SK그룹이 모두 미국 완성차 업체와 합작해 현지에 이미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는 가운데 삼성SDI 역시 미국 진출 이슈 등을 조기에 마무리 지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와 더불어 수년째 매출이 정체된 상태인 삼성전자의 새로운 성장 동력, 즉 신사업 발굴이 이 부회장의 경영 참여로 다시 탄력을 받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 부회장은 2018년 인공지능(AI), 5G, 전장용 반도체, 바이오를 ‘4대 미래 성장 사업’으로 지정하고 3년간 총 25조 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5년간의 투자가 거의 마무리된 현재, 삼성은 새로운 성장 엔진을 탑재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16년 미국 하만 인수 이후 의미 있는 인수합병(M&A) 역시 1건도 진행되지 못했다.
삼성 경영진은 그간 이 부회장의 부재 속에서도 물밑에서 다양한 M&A 매물 등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가 올 초 콘퍼런스콜에서 “최근 3년 내 의미 있는 M&A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지난달 “AI·5G·전장 사업 등 다양한 기업을 대상으로 인수를 검토 중”이라고 언급한 만큼 이 부회장의 결단이 뒤따를지 주목된다. 아울러 오는 2030년까지 총 171조 원을 투자하기로 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역시 이 부회장이 직접 미래 산업으로 지목한 영역이다.
삼성은 이와 더불어 준법 경영을 비롯해 노조 및 협력사와의 상생 등 기업 지배구조와 사회적 책임 부분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부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0%가 이 부회장의 가석방에 찬성하는 등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됐다지만 여전히 일부 시민 단체들을 중심으로 가석방에 대한 반발도 일고 있다.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삼성을 보다 존경받는 기업으로 바꿔나갈 책임이 막중한 셈이다. 이와 관련해 이 부회장은 지난해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준법이 삼성의 문화로 확고하게 뿌리내리도록 하겠다”면서 “대한민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