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일반 기업에 긴급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도록 재정의 손실 부담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신인석(사진) 전 금융통화위원은 코로나19와 같은 금융시장 불안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한은의 ‘최종 대부자’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한은법 80조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종 대부자는 금융시장 위기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자금을 공급해주는 기관으로 흔히 독점적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을 일컫는다.
16일 한국경제학회에 따르면 신 전 위원은 최근 ‘한국은행법 80조의 최종대부자론’ 논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현 중앙대 경영경제대 교수인 신 전 위원은 자본시장연구원장을 거쳐 지난 2016년 4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한은 금통위원을 지냈다.
한은법 80조는 금융기관 외 법인이나 개인 등 민간과의 거래를 제한한 동법 79조의 예외조항이다. 금융기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등 비상 상황에서는 한은이 영리기업에 대출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동안 한은 금통위가 해당 조항 활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사문화됐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손실 위험을 떠안는 데 부담을 느낀 것이다.
신 전 위원은 한은이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유동성 제공 범위에 일반 기업까지 포괄하기로 한 만큼 재정의 손실 부담 등을 명확히 해 제도를 보완하자고 주장했다. 한은 금통위는 지난해 7월 한은법 80조를 근거로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SPV)에 대한 대출을 의결한 바 있다. 신 전 위원은 “금융업자가 아닌 SPV에 대한 대출이므로 80조가 허용한 최종 대부자 유동성의 대상이 비금융 일반 기업까지 포괄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며 “명시적 발언은 없었지만 소수 의견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모든 금통위원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셈”이라고 말했다. 다만 당시 금통위는 ‘국회의 승인’과 ‘재정의 손실 부담’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신 전 위원은 한은법 어디에도 그러한 조건이 명시돼있지 않은 만큼 일반 기업에 대한 유동성 제공을 명확히 허용하되 목적 제한과 권한·의무 등을 제도화하자고 주장했다. 한은이 긴급 유동성 제공 대상을 일반 기업까지 확장할 경우 발권력이 재정 정책에 남용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신 전 위원은 “한은의 유동성 제공 목적을 금융 시스템 안정으로 제한하고 재정 당국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재정의 손실 부담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