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 따른 기저 효과로 자동차, 조선, 정보기술(IT) 기기 수요가 회복되면서 국내 제조 기업들은 상반기 역대급 실적을 거뒀다. 하지만 3분기 이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용이 당분간 가파른 상승 곡선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시기가 당겨질 수 있고 달러 가치 상승(원·달러 환율 하락)도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명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원자재 가격 상승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어서 대응이 어렵다. 자동차·배터리 산업에 상당 기간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자원 개발 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 방안을 마련하고 미래 산업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값 배터리 요청에 대응 못해
원재료 가격 급등에 향후 직격탄을 맞을 곳은 배터리 산업이다. 세계적으로 친환경차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배터리 원재료 수요는 폭증하는데 공급이 따라주지 못하면서 원가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의 주요 원재료인 리튬·니켈은 물론 알루미늄·코발트 가격까지 오름세에 가세했다. 지난달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코발트는 연초 대비 63.1% 올랐으며 알루미늄은 31.0% 상승했다. 리튬과 코발트 등의 원료는 배터리 값의 30~45%를 차지한다.
원재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지만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갖춘 ‘반값 배터리’를 요구하고 있어 배터리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될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물론 배터리 업체는 통상 장기 계약을 맺고 원자재를 공급받기 때문에 지금의 가격 인상이 제조원가에 곧바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계약 갱신 시점에 가격이 상승 흐름을 타고 있다면 계약 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리튬·니켈·코발트 등은 중국 등 일부 국가에 집중적으로 매장돼 있어 공급이 불안정하다”며 “원재료 조달 비용이 하반기 실적의 최대 변수”라고 말했다.
완성차, 철강마저 올라 실적 악화 걱정
완성차 업계도 원재료 가격 상승을 우려하고 있다. 배터리 가격이 올라가면 미래 성장 동력인 전기차의 가격 상승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철강 가격 급등까지 겹쳐 하반기 실적은 상반기에 크게 못 미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서강현 현대차 기획재경본부장은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원자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며 “하반기 실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고 우려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도요타 등 일본 6개 완성차 업체의 총영업이익이 1조 엔가량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이들 업체 영업이익의 30%에 해당하는 큰 규모다.
조선 업체는 이미 원재료 가격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조선 빅3는 올 2분기 조(兆) 단위 적자를 냈다. 한국조선해양이 연결 기준 8,973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고 삼성중공업(4,379억 원 영업손실)과 대우조선해양(1,000억 원 이상 영업손실 추정)도 적자의 늪에 빠졌다. 상반기에 연간 목표를 달성할 정도로 수주는 풍년이었지만 정작 곳간은 비고 있는 것이다. 철강 가격 상승으로 조선용 후판(두께 6㎜ 이상 철판) 가격이 지난해보다 2배가량 치솟은 게 실적 악화의 주요인이었다. 조선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16년 수주절벽에 직면하며 도크를 놀리기보다는 채우기 위해 저가 수주를 했다”며 “현재 당시 계약한 물량을 건조 중인데 철강 가격이 급격히 오르면서 저수익 구조가 돼버렸다”고 전했다. 문제는 철강 가격 상승세가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세계 철강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이 최근 환경 이슈, 자국 기업에 대한 철강 우선 공급을 이유로 수출을 막고 있다”며 “중국산 철강재 수입이 줄어들 경우 국내 철강 가격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물류 대란에 중기는 돈 가뭄
일부 수출 기업은 원재료 가격 상승보다 물류 대란이 더 큰 걱정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의 상황이 심각하다. 한 중소 중공업 대표는 “가격을 4배 올려주겠다고 해도 선적할 배가 없는 상황”이라며 “기계들이 3개월 넘게 창고에 쌓여 있다”고 호소했다. 지난 13일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4,281.53을 기록해 14주 연속 올랐다. 지난해 8월 14일(1,167.91) 대비 4배 가까이 급등한 것이다.
문제는 수출 지연이 생산 차질과 유동성 위기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오세일 이너보틀 대표는 “하반기 선적 일정이 계속 밀리면서 생산 차질까지 빚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구에 위치한 전기차 부품 제조사 대표는 “물류비 상승도 부담이지만 아예 수출이 안 되다 보니 현금화가 늦어지고 운전자금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며 “미래를 위한 투자는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라고 토로했다
물류비의 고공 행진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말 블랙프라이데이·광군절 등 대목을 앞두고 있어 물동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내년 1분기까지 해상 운임 상승세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는 “해상 물류와 관련한 불확실성은 내년 2월 중국 춘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