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점령되는 급변 사태를 겪으면서 주변 열강들의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유럽은 당장 하루에 수만 명씩 쏟아지는 아프간 난민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에는 반(反)서구 인식 확산으로 아프간이 다시 ‘테러의 온상’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힘의 공백’ 상태가 된 아프간에서 세 확장에 나섰다. 지난 19~20세기 영국과 옛소련에 이어 이번에 미국까지 물러나면서 ‘제국의 무덤’이 된 아프간에 또다시 열강이 몰려드는 모양새다.
유럽 ‘시리아 난민 사태' 재연 우려
유럽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것이고 중장기적으로 탈레반 정권이 테러집단화하는 것이다. 당장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16일(현지 시간) “아프간 사태를 논의할 주요7개국(G7) 정상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탈레반을 정상 국가로 인정해야 할지 여부와 함께 아프간 난민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찾자는 취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현지 채용인 등 1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아프간에서 구조하겠다”고 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아프간이 또다시 테러의 성지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럽은 2015년 ‘시리아 난민 트라우마’가 크다. 당시 내전으로 시리아에서는 1,0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고 유럽에도 130만 명을 넘는 난민이 유럽 입국을 신청했다.
국제구조위원회(IRC)에 따르면 아프간 인구(3,983만여 명) 절반가량인 1,800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미군 철수가 단행된 5월 이후 25만 명이 아프간에서 빠져나갔다는 유엔의 통계도 있다. 탈레반이 과거처럼 공포 정치를 편다면 아프간 인구 중 상당수가 난민 신분으로 유럽 등 주변국으로 몰려들 여지가 있다. 현재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이 심각하다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특히 아프간에서 2차 백신 접종까지 마친 사람의 비중은 0.6%에 불과하다. 코로나19에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 인도적 지원으로 탈레반 정권의 관리를 도모해야 하지만 동시에 코로나19 확산 속 난민 수용이라는 난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데이비드 밀리밴드 IRC 대표는 “독일과 프랑스 모두 큰 선거를 앞두고 있어 (난민 수용에 대한) 자국 여론도 고려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중러, ‘美 공백’ 아프간 호시탐탐 노려
중국 정부는 이미 탈레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발 빠르게 접촉하고 있다. 중국의 기민한 반응은 아프간 정세 불안을 틈타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분리독립 바람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탈레반이 신장위구르 분리독립 단체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의 테러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경계심이 작동했다.
미군 철수에 따른 아프간 공백 상태를 국제정치적 교두보로 삼겠다는 전략도 감지된다. 실제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달 말 톈진에서 탈레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와 회담했다. 특히 왕 부장은 16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아프간 연착륙을 위해 미국과 협력할 용의가 있다”며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했다.
옛소련 시절 아프간을 침공했다가 호되게 당한 러시아는 일단 미국을 등에 업었던 이전 정부보다 탈레반에 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실제 러시아는 각국 대사관이 서둘러 폐쇄 및 이전 결정을 내리는 와중에도 자국 대사관을 정상 운영하고 있다. 다만 러시아도 체첸 등지에서 이슬람 무장 조직의 분리독립주의가 발흥할 것을 우려한다. 한편 탈레반은 카타르 도하에서 새로운 정부 구성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마저 탈레반 정권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 정부를 인정할 수 있음을 시사한 만큼 탈레반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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