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성과는 예산과 인력만 많이 투입한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정부 출연 연구원들이 미래 성장 동력 확충과 사회문제 해결 등 국가적 어젠다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관리의 틀을 (안 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푸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꿔야 합니다.”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원장은 18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권이 바뀔 때면 과학기술 거버넌스 문제가 불거지는데 이제는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둘 때가 됐다”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기혁신본부를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 원장은 “출연연이 필요한 기초 기술이나 장비 등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나 단기 과제에 치우쳐 활동하는 바람에 영향력이 큰 연구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업화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DARPA)처럼 창의적이고 임팩트가 큰 아이디어에 대해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으로 투자해 사업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연구개발(R&D) 예산 수립과 평가에서 탄력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양자 컴퓨터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의미 있는 결과물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출연연이 기업으로 기술이전과 창업 등 성장 동력 창출, 국민 삶의 질과 안전 제고,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한 지역 R&D 지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기정통부 산하 출연연만 25개이고 정부 전체로 보면 과학기술 출연연이 더 많은데 전반적으로 출연연의 성과와 한계에 관해 진단한다면.
△과기 출연연은 대체로 대통령 직속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거쳐 과기정통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로 돼 있다. 출연연은 기업 지원과 창업 등 미래 성장 동력을 키우고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사태, 기후 위기 등 탄소 중립 문제에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 50여 년간 그 역할을 비교적 잘 수행해왔으나 그동안 수많은 출연연의 발전, 효율화, 개선, 위상 정립, 발전 전략, 기능 정립, 혁신 방안 등이 수립됐으나 잘 개선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 정부가 바뀌거나 새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출연연을 흔드는 모양새였다. 연구원 입장에서는 새로운 정책이 나와도 큰 감흥 없이 ‘또 지나가겠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출연연에 대한 투자 대비 성과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의견에 일면 동의하지만 산업계와 관련이 높은 출연연의 경우 기술이전 등 생산성은 한국 주요 대학이나 외국의 동종 연구소 실적에 비해 낫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출연연의 성과를 논문·특허·기술이전으로 평가하는데 이것이 맞는 것인지 검토해봐야 한다.
-국운을 좌우하는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려면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가.
△오랫동안 투자하고 관심을 쏟아 축적해야 한다. 과학기술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와서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과학자들을 영입해 R&D를 시작했다. 대학의 연구 기능은 1980년대 중반에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과학 선진국에 비해 출발이 많이 늦었지만 이렇게 대한민국이 단기간에 선진국으로 갈 정도로 발전한 것은 과학기술의 힘이 크다. 이러한 추세로 나간다면 기초 분야 연구에서도 세계를 이끄는 과학기술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산학연 간 R&D와 사업화도 원활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출연연이 기술 사업화를 활성화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출연연의 문제로 지적돼왔던 산학연 연구 기관끼리의 높은 벽을 허물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해야 한다. 출연연이 새로운 연구를 하는 데 필요한 기초 기술이나 장비, 인력 수준 등은 충분하다. 다만 연구 내용이 단기 과제에 치우치다 보니 연구 결과의 임팩트도 당연히 크지 않고, 이를 사업화하는 것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장기 연구를 할 수 있어야 축적한 결과물을 통해 대형 사업화가 가능할 텐데 이러한 부분이 부족하다. 10여 년 전에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다. 검증되지 않아 투자의 위험성이 있지만 창의적이고 임팩트가 큰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투자해야 한다. 여러 개가 실패해도 한두 개가 성공하면 되는 그런 R&D 제도이다. 최근에 외국의 R&D 사례도 점점 DARPA형의 사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단기 연구와 소규모 투자가 아닌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연구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의미 있는 결과물들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R&D 예산 수립과 평가에서 경직성이 있는 한 국민과 국가가 원하는 임팩트 있는 결과는 얻을 수 없다.
-여야 대선 주자들에게 제언하고 싶은 정책 어젠다가 있다면.
△과기정통부의 과기혁신본부는 과학기술에서 범부처를 아울러야 하는, 과학기술에서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있는 조직이다. 하지만 본부장이 차관급으로 부처를 조율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장관급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출연연이 각 분야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각각 독자적인 정책 연구 전담 부서도 설치해줘야 한다. 출연연이 다양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순히 R&D를 하는 기관을 뛰어넘게 해야 한다. 출연연이 고급 인력의 저수지 역할을 하도록 연구원 인력을 과감히 늘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해묵은 이슈 중 하나가 출연연 통폐합 문제인데 노조의 반발로 쉽지 않다. 그래서 현 정부에서 출연연 간 융합 연구를 확대해왔는데 실제 성과가 있는가.
△표준연에도 소규모 노조까지 합쳐 노조가 6개나 있어 정책 결정까지 시간이 걸리는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통로로 활용하고 있다. 그동안 정권 재창출이든 정권 교체든 새 정부가 출범하면 새로운 과학기술 거버넌스가 화두로 대두됐다. 그중 출연연 통폐합 이슈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출연연이 국가 연구소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연구 수행에서 자율성을 주는 게 중요하다. 과학 성과는 단순히 예산과 인력을 투입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효율적 투자와 능력 있는 연구 인력 확보는 선행조건이고 연구자들이 자율적 분위기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관리의 틀을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안 되는 것 외에는 모두 풀어야 한다. 물론 연구자들이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는 것은 기본이다.
-출연연이 지역 R&D에 녹아들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데.
△지역 R&D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출연연 지역 분원에 대한 연계성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재 과기정통부 산하 25개 출연연만 해도 지역에 분원이 100개 이상 된다. 하지만 지자체와 연계해 큰 성과를 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지역 분원이 실질적으로 지역 R&D의 한 주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차기 정권에서 과학기술계 거버넌스와 생태계를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은가.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국가의 모든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인프라의 특성을 갖는다. 과학기술을 통해 모든 부처를 지원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출연연의 상위 거버넌스 체제는 지난 40여 년 동안 담당 부처가 변하거나 총리실 산하에 있는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장단점을 분석해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표준연의 역할과 변화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도량형을 책임지는 국가 측정 표준 기관으로 과학기술 육성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표준물질, 미세 먼지 농도,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탄소 배출량, 수소차와 전기차 충전량, 수입 수산물의 방사선량, 먹거리의 중금속량 측정 기술을 개발하는 업무 등을 한다. 박현민 원장 취임 이후 360여 명의 박사급 인력을 5명 내외의 70여 개 팀으로 개편해 각자 우수성을 꾀하며 팀 간 시너지를 내도록 했다. 각 팀이 연구 주제에 빠르게 대응하고 수월성 있는 연구를 하도록 한다. 몇 개의 팀이 모여 양자 컴퓨터 등 선도(first mover) R&D에도 나선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클라우드를 활용한 자료 공유 시스템 등 비대면 방식의 ‘버추얼랩(Virtual Lab)’도 구축했다. 버추얼랩장은 연구원과 협업이 가능한 외부 전문가를 위촉해 개방형 연구 조직을 만들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안전성평가연구소 등 타 출연연과 개방형 연구 체제도 마련했다. 산학연 협업 연구 활성화에도 나섰다. 특히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도전할 만한 기술을 정해 대학과 협업해 기술을 개발하고 기업에 이전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He is…
1962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재료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독일 아헨공대 결정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했다. 1996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들어와 신물질 구조분석 및 나노 물질 연구를 수행했다. 나노소재측정센터장을 하며 나노 물질 안전성 연구를 처음 시작하고 국가나노안전센터 구축에 기여했다. 한국연구재단 나노안전성 분야 전문위원도 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정책, 예산, 평가 등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쌓고 표준연 부원장을 지냈다. 현재 표준연 원장을 맡으면서 국가과학기술심의위원, 2050탄소중립위원회 위원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