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언어정담] 당신은 ‘바운더리(경계)’ 문제가 있군요!

작가
타인이 원하는 것과 해줄 수 있는 것
경계선 명확히 해야 행복할 수 있어
내 마음의 '한계' 인식하는 용기 필요

정여울 작가

우리는 자신의 경계를 정확히 표현하는 법을 알고 있을까. “전세금은 못 도와줘” “네 결혼식에 못 가” “그 일은 내 능력 밖이야” “밤 10시가 넘으면 전화하지 말아줘” “주말엔 카톡을 꺼둡니다.” 이렇게 ‘하기 어려운 말들’을 상대에게 정확히, 불쾌하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바운더리(경계) 심리학’의 주제다. 자신을 정확히 표현하는 법,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경계를 구분하는 법,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의 차이를 스스로 깨닫는 것. 이 모든 것은 바운더리 심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마음의 한계선 긋기다. 심리학자 테드라 타왑은 우리에게 ‘바운더리’가 필요하다는 징후를 이렇게 진단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화부터 날 때. 뭔가 부탁할 것 같은 사람과는 통화나 만남을 피하고, 도와줬는데 아무 보상도 못 받은 것에 대해 자꾸 불평하게 되는 경우.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고, 다 그만두고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것.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이 모든 것이 ‘바운더리’가 필요하다는 징후라는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와 달리, 바운더리 문제는 사실 누구나 겪고 있는 문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바운더리를 설정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가. 엄마는 나를 키울 때 내가 워낙 ‘사 달라’는 것, ‘해 달라’는 것, ‘가르쳐 달라’는 것이 많아 속상하셨다고 한다. 장난감이나 동화책을 사주지 않으면, 길가에 주저앉아 펑펑 우는 여섯 살 딸 때문에 엄마는 홀로 집에 돌아와 눈물 지었다. 엄마의 형편으로는 내 모든 호기심과 배움의 열망을 채워줄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호기심 많은 아이,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 꿈도 많고 탈도 많고 슬픔도 눈물도 많은 아이. 그 여섯 살 아이를 지금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모든 것을 다 해내지 못해도 괜찮아. 넌 결국 네가 원하는 삶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갈 거야.” 돌이켜보면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아이가 원하는 것과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정하지 못해 항상 우울하고 답답했던, 불쌍한 우리 엄마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딸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지 못해도 돼. 너의 능력을 탓하지 마. 너는 네 안의 커다란 사랑을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바운더리 심리학을 공부하며 나는 내 마음 속에 짙은 안개처럼 드리워있던 우울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 자신을 향한 기대치’는 물론 ‘이 세상을 향한 기대치’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많은 능력과 재능을 내 자신에게 바라고, 너무 많은 인정과 사랑을 이 세상에 기대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행복을 향한 경계짓기에 도전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며, 내가 사랑하는 일에 열정을 쏟을 의무가 있으며, 그 이상의 것에 욕심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 이상을 바람으로써 나 자신을 괴롭히는 자기 혐오의 제스처를 멈추기로 한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상대도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사랑해도 우리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존중할 수 없다는 것. 다만 우리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바운더리 문제는 풀리기 시작한다. 자기혐오를 멈추고 자기공감(Self-compassion)의 따스함을 회복하기. 그것이 바로 바운더리 심리학의 아름다운 쓸모다. 바운더리 심리학을 배우며 나는 비로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바로 내 안에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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