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거대 여당이 거침없이 입법 폭주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교육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언론중재법·사립학교법 개정안 등의 상임위원회 통과를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위성 정당’인 열린민주당의 김의겸 의원, 민주당에서 제명된 윤미향 무소속 의원을 ‘야당 몫’의 안건조정위원으로 활용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 기업 규제 3법, 대북전단살포금지법 등 위헌 논란이 있는 법안들을 야당의 반대 속에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독주 행태는 이제 여의도의 일상이 됐다.
합리적 정치철학자로 알려진 김영수 영남대 정치행정대학장은 23일 대학 연구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지난 1987년 민주화 체제 등장 이후 자유·민주·인권 등 민주주의 핵심 가치가 문재인 정부처럼 철저하게 훼손된 적은 없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자신들만 옳다는 식으로 폭주하고 있으니 마치 중세 시대 종교 탄압을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 학장은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킨 주축이 한미 동맹이라는 점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인데도 현 정권은 잘못된 현실 인식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며 한미 동맹 균열을 우려했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약자의 트라우마로 안보 문제를 바라보며 미국 등 강자를 악으로 규정하고 중국·북한과는 가까워지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계기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국가는 하나의 집과 같다. 집 밖에 나가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정글의 세계다. 인간이 국가를 만든 것도 안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는 약탈·폭력 등의 위험이 일상화되기에 약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국가를 기피하는 현상도 나타나지만 국가 없이 개인의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여러 시사점을 주지만 그중에서도 국가 없는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내년 대선까지 6개월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 4년을 평가한다면.
△정치는 시차를 두고 판단해야 할 영역이다. 더구나 국가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10년, 20년의 시차를 두고 보는 게 객관적이다. 그럼에도 굳이 평가한다면 1점도 주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시대착오가 가장 큰 문제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 추종했던 ‘해방전후사’에 기초한 인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준이던 시대의 세계관으로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의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있으니 진단부터 잘못됐고 해법 역시 틀릴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있다고 보는가.
△가장 큰 문제는 문재인 정권 사람들은 스스로 ‘선(善)’을 행하고 있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자주·민족 등 이념을 중심에 놓고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이를 현실 정치에서 실행하는 것을 ‘선’ 혹은 ‘정의’라고 인식한다. 사실 이는 일제 식민 시대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와 깊이 관련돼 있다. 우리는 왜 식민지로 전락했는가, 왜 노예처럼 살아야 했는가 하는 분노가 강대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고 반일·반미 감정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최근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가 단적인 사례다. 김 회장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박근혜 정부를 ‘친일 반민족 정권’으로 규정하며 친일 청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반일과 친일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나눠 우리 국민들에게 내재된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방식이다. 매우 후진적인 접근법인데도 우리 정치에서 반일 프레임이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도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한미 동맹이 흔들리면서 안보 위기감도 커지고 있는데.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킨 것이 한미 동맹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약자의 트라우마와 안보 현실이 거꾸로 가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급변하는 국제사회에서 힘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지 못하면 구한말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에는 ‘북풍(北風)’이 불면 보수 정권에 유리하다는 정치권의 속설이 있었다. 최근에는 그런 공식이 통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안보는 힘의 영역이다. 이를 평화 혹은 자주라는 말로 덮어씌우니까 중국과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국민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대다수 전문가들은 6월 지방선거에서 보수 진영이 이길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수십 년간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안보’를 전면에 내건 보수를 찍는 경향이 강했지만 2010년 당시에는 뜻밖에도 야당(현재 여당)의 평화 공세와 천안함 음모설 제기가 먹혔다.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우리 국민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적에 맞서 싸울 태세가 안 된 나라가 스스로를 지킨 사례는 역사적으로 전무하다. 전쟁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전쟁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전쟁에서 이길 준비는 돼 있어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미중 갈등 증폭으로 동북아시아 안보 상황이 6·25전쟁 이후 가장 위험하다. 극단적으로 내일 당장 전쟁이 발발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평화도, 대화도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김 학장도 586세대로서 운동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 진보 진영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의의 잣대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복잡다단한 경제 문제는 반(反)시장주의에 갇혔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교육은 배타적 민족주의에 젖어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자유이며 그 안에서 정의도, 평화도 가능한 법인데 진보 진영은 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부동산이나 일자리 등 경제 현안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겨도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부작용이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니 정책을 전환하기는커녕 오기로 더 강한 규제를 들이대 시장은 망가지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하는 운동권적 세계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갈등과 분열이 극심해졌다는 비판들이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은 (이념적으로) ‘준(準)내전 상태’와 다름없다. 진보 진영에서 ‘촛불 혁명’이라고 명명했을 때만 해도 일종의 수사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정말 ‘혁명’으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혁명은 하나의 이념을 갖고 사회 전체의 틀과 질서를 완전히 갈아엎는 것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악을 없애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적폐 청산’을 역사적 과업으로 내세웠다. 원리적으로 탈레반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정치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차이에서 출발해야 한다.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절멸의 대상으로 간주하니 총만 들지 않았을 뿐 내전 상태나 마찬가지다.
-현 정권이 헌법 가치와 법치주의를 훼손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
△대북전단살포금지법,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 등 일련의 입법 폭주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문재인 정권은 자신들이 ‘선’을 행하고 있으니 전혀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중세 시대 종교 탄압도, 스탈린의 전체주의도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적어도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들어 헌법 가치를 훼손하는 일은 없었다. 자신만 옳다는 독단에 빠져 다름을 일절 허용하지 않고 심지어 이견(異見)을 불법으로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현 정권에서 ‘민주주의 위기’라는 경고음이 계속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 두 개의 바퀴로 움직이는 수레와 같다. 두 바퀴가 잘 굴러가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종종 충돌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국민주권주의에 두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법치주의를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목적만 정당하면 법이야 아무래도 괜찮다는 의식이 강하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놈의 헌법’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특히 정치 영역에서는 인간의 감성이 주된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가 쉽지 않다. 이를 이성의 영역에서 보완하고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주는 장치가 바로 법이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완전하지 않기에 법치주의를 채택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현 정권은 법이 정치의 발목을 잡는다고 규정하고 ‘사법부 개혁’을 명분으로 검찰 장악을 시도했다. 주권자인 국민과 선출된 권력의 명령이니 임명된 권력인 사법부는 군말 없이 따르라는 식이다. 법 절차가 지켜져야 민주주의도 온전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주권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이지만 실질적으로 적법 절차와 법치주의를 중심에 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He is…
1960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에서 정치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부터 영남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3년 동안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을 지낸 뒤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영남대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을 거쳐 현재 정치행정대학장을 맡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편집이사와 한국정치사상학회 총무이사 등의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