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아프간 점령 이후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황급히 짐을 싸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으나 또다른 불확실한 미래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서 낯선 타국에 던져진 이들은 일단 생명의 위협이 사라져 안도하면서도, 고국을 등지고 미국에 정착해 제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 속에 막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국 정부가 탈레반의 신속한 아프간 장악에 전혀 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행을 택한 아프간인들이 폭증해 수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고 미국 주요 언론들은 지적한다. 29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지난 28일 기준으로 11만7,000명 이상이 카불을 빠져나왔다. 대다수는 아프간 국민으로, 이들 중 이미 수천 명은 미국 땅을 밟았고 나머지는 카타르 등 중동과 독일 등 유럽의 중간 경유지에서 신분 확인, 비자, 난민 인정 작업을 거치면서 미국이나 제3국행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미국에 들어온 아프간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미국의 수용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해 미국 정부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탈레반의 신속한 진격과 아프간 정부의 몰락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미국의 오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미국의 난민 정착 지원기관인 HIAS의 마크 헷필드 대표는 피란민들이 어디로 가게 될지에 관한 WP의 질의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면서 "나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 카오스 상황"이라고 말했다. 카불 공항의 극심한 혼란과 테러 위험에서 벗어나 카타르 도하 등 경유지에 도착한 아프간인들은 안도할 틈도 없이 또다시 열악한 상황에 직면했다.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도하 알우데이드 미 공군기지의 격납고 안에 설치된 아프간인 임시 숙소는 불볕 더위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에어컨만 가동되고 있으며, 화장실도 오물과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미군 장병들이 예상치 못한 아프간인들의 폭증에 따라 이들을 돕기 위해 24시간 일하고 있지만, 이미 카타르 미군기지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면서 또 다른 인도주의적 재난의 우려가 있다고 NYT는 지적했다.
알우데이드 기지에서 며칠을 보낸 아프간인들은 도하 외곽의 옛 미군기지였던 캠프 아스 사일리야에 설치된 거처로 옮겨 지내고 있다. 아프간인들이 몇 달간 지내야 하는 이곳도 이미 수용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식사 배급을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 기다리지만 손에 드는 미군 전투식량은 양이 넉넉하지는 않다고 한다. 그래도 이런 무더위와 배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지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이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카불 공항서 경찰관으로 일하다 홀로 탈출한 한 남성은 부인과 세 자녀가 카불에 남아있다고 했다. 그는 NYT와 인터뷰에서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가족이 탈레반의 표적이 될까 봐 밤에 잠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 땅을 밟은 사람들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난민 자격을 갖춘 이들은 미국에서 정착 지원을 받을 수 있어 걱정이 덜하지만, 급하게 탈출하는 바람에 신분증과 서류를 챙겨오지 못한 대부분의 아프간인은 믿었던 미국 정부조차 우왕좌왕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실정이다. 미국에 도착한 일부 아프간인들은 아프간 이민자 사회가 있는 캘리포니아 남부 등지에서 정착을 모색하지만, 물가가 비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민자들을 돕는 미국 시민단체 '이미그런트 ARC'의 캐밀 매클러 이사는 WP와 인터뷰에서 카불을 탈출한 아프간인들이 관료주의로 점철된 시스템과 직면했다면서 "안전하지도 않고 투명성도 없고 조직적이지도 않은 과정"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아프간인들의 법적 지위 문제 해결을 위해 비영리단체와 난민정착지원단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면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간 난민사태에) 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