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들에게 매뉴얼을 보여줬더니 시대에 너무 맞지 않는데 굳이 있어야 하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세종으로 청사를 옮기면서 비서실의 역할도 축소됐고 장차관 모두 휴대폰으로 직접 통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사 지인의 기념일을 챙기고 인사 각도까지 정해 놓은 이런 의전 매뉴얼을 젊은 직원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A부처 한 공무원)
최근 법무부 차관의 ‘우산 의전’ 논란으로 공직 사회 특유의 상명하복 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센 가운데 인사혁신처가 전 부처에 배포한 비서 매뉴얼에 대해 공직 사회 안팎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비서직에 대한 전문성 확보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의견과 시대에 맞지 않는 권위적인 공직 사회 문화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지적이 엇갈린다.
31일 서울경제는 인사혁신처가 지난 2018년 10월 전 부처에 배포한 ‘비서업무 매뉴얼’에 문제점이 있는지 시민 단체인 직장갑질119에 의뢰했다. 총 232페이지 분량의 매뉴얼은 정부 장차관, 전·현직 비서진의 경험담을 토대로 제작됐다. 공직 사회에서 실제 일어난 일과 해야 할 일들이 담겼다. 민간과 달리 공직 사회는 비서 업무를 인사 발령에 따라 일반 직원이 순환 보직으로 맡는 경우가 많다. 공무원 누구나 비서가 될 수 있고 비서가 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다.
매뉴얼은 상사를 두 번 이상 복도에서 만나거나 타 부서 상사나 손님과 스칠 때 상체를 15도 구부리라고 적시했다. 윗사람과 헤어질 때는 30도, 공식 석상에서 처음 인사할 때는 45도로 숙여 인사하라고 돼 있다.
상사가 전화 연결을 원하는 상대방이 직위가 같은 경우 ‘상사와 상대방이 수화기를 동시에 들도록 중재한다’고 안내한다. 직위 차이를 전화 통화에서도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상대방이 상급자인 경우에는 상사가 먼저 전화기를 들도록 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차량에서 2인 탑승 시 앞좌석에 앉은 비서 뒷자리에 상사가 앉는 등 접견실·회의실·비행기에 상사가 앉아야 할 자리를 정해 놓았다.
특히 메뉴얼은 비서의 업무 중 하나로 상사의 윗사람, 동료, 부하 직원 등의 생일과 기념일 기타 주요 사항을 파악해 상사에게 알리라고 적시했다. 상사의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재스민·라벤더, 속이 더부룩할 때는 페퍼민트, 몸에 열이 많은 상사에게는 메밀차를 대접하라고 제안했다.
수행 비서에 대해서는 ‘비상 전화가 올 수 있기 때문에 항시 업무 폰을 켜놓고 휴대하라’고 역할을 정했다. 하지만 정작 비서 업무를 하면서 부당한 경우를 당한 경우에 대한 안내는 매뉴얼에 빠져 있다.
권두섭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매뉴얼은 전체적으로 비서 업무를 하는 동등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업무상 필요성과 상하 직급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며 “경조사 부분을 보면 상사의 사생활까지 비서가 도와줘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A부처 한 공무원은 “최근 모 부처는 실·국장 비서실을 없애고 한 장관은 수행 인원을 줄이라고 지시하는 등 공직 사회도 평등한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런 매뉴얼은 과거 공직 사회에 권위적인 문화가 있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답답해 했다.
인사혁신처는 매뉴얼에 대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현재 활용되고 있지 않으며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해명했다. 처음 비서직을 맡은 공무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제작됐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전화 예절의 경우 행정안전부의 대국민 서비스 관련 훈령을 참고하는 등 각각의 근거가 있다”며 “비서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가이드라인”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30일 법무부 차관의 과잉 의전 논란에 대해 공직 사회의 관행을 되돌아보고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