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미술 시장의 허브인 홍콩이 정치 이슈에 휘말린 틈을 타 일본이 정부의 정책적 지원 하에 홍콩의 빈자리를 파고들고 있다. 탄탄한 내수 시장에 더해 세제 혜택 등을 앞세운 일본 미술시장이 본격적인 재도약을 노리면서, 여전히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빈약한 한국 시장과의 격차가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전문가들은 문화예술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키우려면 관련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31일 미술계에 따르면 일본이 현대미술 다양성 확보를 기치로 오는 11월 4~7일 처음 개최하는 ‘아트위크 도쿄(Art Week Tokyo)’에 세계 최정상 아트페어인 ‘아트 바젤’이 지원군으로 나선다. 아델린 우이 아트바젤 아시아디렉터는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유서깊은 갤러리와 미술관을 가진 도쿄에서 역동적인 현대미술의 장을 펼치는 데 협력하게 돼 기쁘다”면서 “이번 프로젝트는 아시아의 성장하는 예술 시장에 대한 아트바젤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된 아트바젤은 ‘아트바젤 홍콩’을 닷새 간의 행사 동안 최대 3조 원 규모의 미술품 거래를 성사시키는 아시아 최고의 아트페어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아트바젤 홍콩은 2019년 반정부 시위로 인한 정치 불안과 뒤이은 코로나19 여파로 행사를 제대로 열 수 없게 됐다. 홍콩의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한국과 싱가포르 등이 물밑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트바젤이 일본과 손 잡은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파격적 규제 완화가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월 미술 시장 활성화를 위한 규제 완화의 일환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아트페어와 갤러리·경매회사의 ‘수입 절차 간소화’와 ‘면세’를 선언했다. 이에 화답하듯 세계 정상급 화랑인 페이스갤러리가 일본 분점을 여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는 마크 글림처 페이스갤러리 회장의 인터뷰가 나오기도 했다. 미술전문매체 아트넷도 ‘아트위크 도쿄’가 “미술산업 관계자들을 끌어모으려는 일본의 새로운 세제 혜택을 기반으로 열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은 이미 1980년대 세계 미술시장의 최고 강자로 군림한 바 있다. 탄탄한 미술애호 문화에 인상주의 회화를 중심으로 한 수준 높은 서구 근대미술 시장이 큰 몫을 차지했다. 이후 ‘버블경제’ 붕괴로 장기 불황을 보냈지만, 일본 미술 시장은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반면 한국 미술시장은 답보 상태다. 최근 시장 호황의 청신호가 켜지기는 했으나 지난 십 수년간 한국 미술시장 규모는 4,000억 원대(예술경영지원센터 미술시장실태조사 기준)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년 전 공식 집계로만 2조7,000억 원, 실제는 최대 4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일본 시장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빈약한 내수시장 활성화를 위해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고 숱한 공청회가 열렸지만 논의에 뚜렷한 진전은 없고, 상속세를 문화재와 미술품으로 대납하게 하려는 ‘물납제’는 최근 좌초됐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미술계에서 미술품 수장고 사업을 할 수 있는 ‘자유항’, 미술거래와 관련된 세금을 면세해 주는 ‘예술면세특구’ 등을 수년 전부터 요구하고 있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변원경 아트부산 대표는 외환 거래 제약 때문에 수만 달러 이상의 작품이 거래되는 해외 갤러리나 외국의 큰 손 컬렉터 등이 금융의 불편함을 자주 호소한다고 지적했다. 아트바젤이 금융거래가 비교적 자유로운 스위스 소도시에서, 글로벌 금융그룹 UBS의 후원으로 열려 대성공을 거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우리 정부가 문화예술을 미래 먹거리로 판단하고, 아시아 미술시장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지가 있다면 규제 완화가 필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