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얼마나 바쳤단 말인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하고 있는 신라의 첫 왕성인 경주 월성의 서(西)성벽에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뼈가 ‘또’ 출토됐다. 지난 2017년 발굴에서 50대 남녀의 인골이 나온데 이어 이번에는 체구가 작은 성인 여성의 뼈가 발견됐다. 월성 서성벽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낸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실제로 확인된 국내 유일의 사례다. 이로써 지난 1985년과 1990년 월성 유적지 초기 발굴 조사 때 나온 인골 20구의 성격도 다시금 주목을 끌게 됐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7일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주 월성 서성벽에서 최근 확인한 여성 인골과 장신구, 주변의 동물 뼈 등을 공개했다. 새롭게 발굴된 여성 인골은 지난 2017년 발견된 50대 남녀 인골과 겨우 50㎝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발견된 위치는 서쪽 성문 자리를 중심으로 성벽 축조가 시작되는 연결 부위였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앞서 발견된 50대 남녀 인골과 이번에 확인된 여성 인골이 보이지 않는 직선을 이루며 놓였고, 이들이 문(門) 자리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중심골조와 평행하게, 마치 성벽을 에워싸듯 배치됐다”면서 “연약한 습지 위에 월성 기초부 공사를 끝낸 후 본격적으로 성벽을 쌓기 직전 사람·동물 등을 제물로 바친 정황이 확인된다”고 말했다.
보통 인골이 발견되면 골반 뼈를 통해 성별을 확인하고 두개골과 치아뼈로 연령을 추정한다. 이번에 발견된 인골을 분석한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은 “골반뼈의 상태가 취약했지만 전체적 골격 발달 양상으로 신장 135㎝의 왜소한 성인 여성으로 추정된다”면서 “앞서 2017년에 발견된 50대 남녀 인골도 치아상태에서 영양부족이 보였는데 이번 여성 인골도 영양 상태가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에 확인된 여성 인골은 이전과 달리 곡옥 모양의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했다.
여성 인골의 머리 옆 어깨 부근에서 토기 항아리가 함께 발견됐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일반 부장품과 달리, 큰 토기 안에 작은 토기가 겹치게 담겨 있는 것이 ‘인신공희’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벽의 중심골조 앞쪽으로 인골이 놓였고, 그 앞쪽 지점에서 말·소 같은 대형 동물의 뼈가 늑골 위주로 발견된 것도 이번 조사의 성과다. 장기명 연구사는 “중심골조의 위치와 인골의 위치는 인위적, 의도적으로 맞추지 않고서는 어려운 배치”라며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게, 성문을 지나는 기운을 좋게 다스리기 위한 축원을 담아 성벽 공정의 중심 지점에서 정성스런 제사의식을 지냈다고 추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을 묻은 토층의 높이는 50~70㎝ 정도였다. 장 학예사는 “흙 쌓이는 순서로 보면 50대 인골 이후에 여성 인골을 묻은 것인데 그 시간차가 미미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묻혔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분석했다.
앞서 1985년과 1990년에 발굴된 20구의 인골은 이번 발굴지점보다 10m 정도 성체 안쪽으로 들어간 위치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최근 인신공희의 흔적으로 발견된 3구의 인골 상태가 양호한 것과 달리 동물뼈와 일부 섞인 채 흐트러져 발견된 것이 17구, 인골만 따로 분리된 것이 3구였다. 장 학예사는 “당시 다량의 인골이 발견된 토층 위치는 인신공희 지역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다”면서 “성벽 축조 과정 중에 들어간 인골임은 확실하나 인신공희 여부 등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집단 제물로 바쳐진 흔적일 수도 있으나, 대규모 토목공사 과정에서 사고로 죽은 이들을 공동 부장 형태로 묻은 것일 수도 있는 등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경주 월성이 파사왕 22년(101년)에 축조된 것으로 전한다. 이번 서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월성은 문헌 기록보다 약 250년 이후인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반을 다지고 쌓은 1차 초축성벽에서 발견된 토기 대부분이 4세기 전반의 유물이었고, 그 위에 인신공희와 함께 묻힌 토기들이 4세기 중엽의 것으로 분류됐다. 이어 성벽 몸체인 체성부는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까지의 토기가 분포한 것을 통해 축조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토기 양식으로 연대를 확인하는 토기편년 뿐만 아니라 탄소연대측정법의 일종인 가속질량분석기(AMS·Accelerator Mass Spectrometer) 분석에서도 서성벽의 축조 시기는 350년 무렵 시작돼 약 50년간 진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신라가 처음 세운 왕성인 월성 축조 연대를 두고 2세기 초부터 5세기까지 논란이 많았으나 이번 발굴을 통해 4세기 중엽 짓기 시작해 5세기에 완성됐음이 확인됐다”면서 “그 시기는 주변 부족국가를 통합한 사로국이 마립간의 왕호를 쓰며 신라로 도약하던 때이고, 적석목곽분을 사용하는 등 강력한 왕권국가로 성장하는 전환적 시기의 맥락 속에서 월성이 축조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인신공희도 축조과정에서 한둘이었던 게 아니라 생각이상으로 많은 것은 그만큼 월성 축조에 공을 들였다는 뜻”이라며 “일련의 발굴 결과를 통해 4,5세기 신라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월성 서성벽 발굴조사는 월성의 축조시기와 구조 파악이 주 목적이었다. 월성 성벽은 너비 약 40m, 높이 10m 이상의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인 규모로 확인됐다. 돌과 흙으로 축조된 성벽을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식물재료를 사용한 것도 이번 조사에서 밝혀졌다. 안소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특별연구원은 “성벽 기저부(아랫단) 조성층에서는 볍씨 껍질과 볏집, 조 껍질 덩어리, 가공된 목재 파편 등이 확인되고, 성벽 몸체부에서는 벼과 식물로 만든 두께 1㎝ 미만의 회백색 층이 켜켜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서 “이 같은 식물재료층은 성벽 내 흘러든 물을 서서히 배출하는 식으로 인장강도를 높여 성벽의 안정성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시멘트가 없던 시절 신라인이 사용한 고도의 토목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식물 재료를 이용한 축성법으로 일정 간격 나무를 박는 지정(地釘)공법과 목재·식물류를 층층이 까는 부엽(敷葉)공법이 있는데, 경주 월성은 토성에 이같은 기법이 사용된 가장 이른 사례가 됐다.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고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저력에 고도의 축성기술도 한몫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월성 서성벽 발굴 조사의 성과와 관련 학술토론을 유튜브를 통해서도 공개한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과 미술시장, 문화재에 대한 뉴스를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