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전쟁을 국가 안보 문제로 인식하면서 전방위 공세에 나섰다. 백악관은 23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장이 주재한 화상회의에 삼성전자와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소집해 반도체 수급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미국 내 적극적인 투자를 독려했다. 올 들어 벌써 세 번째 반도체 대책회의를 진행할 만큼 각별한 의지를 과시한 셈이다.
주목할 것은 미 상무부가 이날 반도체 재고·주문·판매 등과 관련된 내부 정보를 45일 이내에 제출하라고 기업들에 요청했다는 점이다. 미 정부가 정보 공개를 강제하기 위해 ‘국방물자생산법’ 발동까지 검토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반도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한국전쟁 당시 만들어진 법까지 동원할 정도로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GVC)에 동참하라는 요구로도 읽힌다. 우리로서는 주력 제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수급 상황에 따라 가격 부침이 심해 자칫 시장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유럽연합(EU)도 역내 기업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책을 담은 ‘반도체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역시 ‘반도체 굴기’를 목표로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에 힘입어 생산 시설 확충에 뛰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더 공격적인 행보가 필요한 때”라고 말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미국은 1980~1990년대에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반덤핑 조사, 지식재산권 침해 제소 등 거센 통상 공세를 펼쳤다. 결국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와 제조 장비 분야로 특화하면서 반도체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갈수록 격화하는 반도체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정부와 기업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국가핵심전략산업특별법’은 국회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법안은 기업들이 요구했던 수도권 대학 정원 조정, 화학물질 등록 기준 완화 등 핵심 내용이 빠져 생색내기에 머무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추진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착공은 화학물질 사용 등 규제 사슬에 막혀 또다시 미뤄졌다. 이대로 가면 반도체 선도국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일본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