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한계 실험한 붓질...색다른 미술이 되다

[행위예술 대표작가 이건용]
1976년 선보인 신체드로잉 연작
시리즈 9종 모두 신작으로 제작
'바디스케이프' 새로운 이름 명명
갤러리현대 내달 31일까지 개인전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2' 제작과정 중 일부.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왜, 그림을 꼭 화폭 앞에서 정면으로 그려야 하는가?”


화가는 화면의 뒤에서, 혹은 화면을 등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딱 자신의 키높이 만한 캔버스의 화면 뒤에 서서 붓 든 손을 앞으로 내밀고는 닿는 데까지 선을 그었다. 그림 그려진 부분 만큼 캔버스를 접고, 또 뒤에서 팔을 뻗어 붓질을 계속했다. 가슴팍까지 올라온 캔버스 너머로, 이번엔 좀 더 길게 붓질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또 그려진 만큼 캔버스를 접으니 남아있는 화면이 다리 길이보다도 짧다. 허리를 최대한 구부려 또 팔을 뻗어 붓질을 한다. 그만큼을 더 접으니, 이제 화가는 쭈그리고 앉아 얼마 남지 않은 캔버스를 채워야 한다.



화면 뒤에서 팔을 뻗어 제작하는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1' 제작과정 중 일부. /사진제공=갤러리현대

1970년대 행위예술의 선두주자이자 최근 국제 미술계의 가장 강력한 관심을 받고 있는 원로화가 이건용(79)이 1976년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처음 선보인 ‘신체드로잉 76-1’의 작업 과정이다. 5개 층으로 구분된 낙서 같은 붓질이 꼭 추상표현주의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표현과 분출이 아닌, 설정된 논리와 인체의 한계에 의해 완성되는 전복(顚覆)적 회화다.



이건용 '바디스케이프 76-1-2021'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건용의 ‘신체드로잉’ 연작에 ‘바디스케이프(Bodyscape)’라는 새로운 이름을 명명한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10월 31일까지 열린다. 작가는 1976년 발표 당시 선보인 9가지 종류의 연작을 작업 논리를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76년 시리즈 9종 모두를 신작으로 제작해 개인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체드로잉 76-2’는 화폭 앞에 뒤돌아 선 채 몸 뒤쪽으로 팔을 뻗어 선을 그은 작품이다. 우선 머리를 따라 선을 그리고, 어깨 위로 최대한 팔을 뻗는다. 옆으로도 뻗고 허리 숙여 다리쪽으로도 쭉쭉 내리 긋는다. 완성작은 작가 몸이 있던 자리만 여백으로 남긴 채, 새의 날갯짓 같은 형태를 이룬다. 이건용 자신이 “나의 자화상”이라고 칭하는 작품이다.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2-2021'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일명 ‘하트 그림’이라 불리는 ‘신체드로잉 76-3’은 캔버스 앞에 옆으로 서서 그렸다. 물감 묻힌 붓을 쥔 손을 최대한 뒤로 보낸 다음, 팔을 최대한 뻗어 둥근 궤적을 그린다. 오로지 신체의 가용 범위에 따라 작업했을 뿐이건만, 좌우로 각각 그은 선은 심장과 사랑을 상징하는 완벽한 ‘하트’ 형태가 됐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화가는 모름지기 자기 앞의 평면에 무언가를 그리지만 나는 화면을 놓고 내 신체가 허용하는 것 만큼만, 화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선을 그린다”면서 “팔을 움직여 그은 선을 통해 내 신체가 평면을 지각(知覺)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76-4’는 팔을 부목에 묶어 움직이기 어렵게 한 뒤 단계 별로 묶음을 풀어나가면서 탁자 위 화면에 선을 그은 것이고, ‘76-5’는 캔버스를 바닥에 눕히고 양다리 사이로 선을 그어 완성한다. ‘76-6’은 화면을 앞에 두고 양팔을 좌우로 크게 뻗어 선을 그린 것인데, 45년 이상 작업을 했더니 마치 컴퍼스로 그린 것 같은 원이 탄생했다. 마지막 ‘76-9’는 화면 앞에 서서 양팔을 동시에 좌우로 뻗으며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몸부림치듯 그은 선인데, 흡사 천사의 날개를 닮아 ‘날개 그림’이라 불린다.



일명 '하트그림'이라 불리는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76-3-2021'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건용이 일명 '하트그림'으로 불리는 '바디스케이프 76-3'을 제작하는 모습.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건용의 '신체드로잉' 대표작 9점의 신작을 모두 선보인 갤러리현대의 전시 전경.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건용의 기발함은 홍익대 서양화과 입학시험 때부터 드러났다. 작가는 “입시 때 아폴로 석고상의 얼굴 대신 뒤통수를 그렸더니 당시 미술대학 학장이던 김환기 선생도 놀라더라”면서 “미술 밖에서 미술을 봤고, 회화 밖에서 회화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일찍이 1960년대 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조형학회(ST) 등에서 활동하며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을 시도했던 그다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을 때, 작업 재료가 될 나무와 흙을 찾아 파리 시내를 헤매던 중 ‘몸을 예술의 매체로 쓰는 행위미술’에 대한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신체적 제약과 한계를 실험하며 ‘안 보고’ ‘팔 묶어’ 작업한 그림들은 소소한 일상 활동까지 제한 당했던 1970~80년대 군부 독재시대를 암시적으로 꼬집은 것이기도 하다.



이건용이 팔을 부목으로 묶어가며 그리는 '바디스케이프 76-4'의 제작과정. 군부 독재시대의 억압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는 작업이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건용은 국립현대미술관이 2014년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로 기획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됐고 비엔날레와 미술관 전시를 중심으로 대중에 소개됐다. 글로벌 화랑인 페이스(PACE)갤러리가 지난 2018년 북경 개인전을 열면서 난생 처음 상업적 주목까지 받기 시작했다. 2016년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두 번째로 열린 이번 개인전에 걸린 작품들은 개막 전에 이미 ‘완판’(Soldout)됐다. 경매에서는 10호 미만 소품이 수천 만원, 대형 회화는 1억 원 이상에 거래된다. 이건용은 내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는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 전시에도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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