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후임을 선출하는 독일 연방의원 총선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SPD)이 집권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J) 연합을 누르고 16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득표율 차이가 1%포인트대에 불과한 신승이다.
그러나 승리를 만끽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즉각 연정 구성을 위한 ‘수 싸움’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민당과 기민·기사당 모두 올해 크리스마스 전까지 연정 협상을 마무리할 방침이지만 협상이 늦어질 경우 ‘유럽의 대장’ 독일의 권력 공백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27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최종 개표 결과 1위는 25.7%를 득표한 사민당, 2위는 24.1%를 얻은 기민·기사당이 각각 차지했다. 이어 환경주의 정당인 녹색당(14.8%), 친기업 성향인 보수 자유민주당(11.5%) 순이었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과 사회주의 좌파 성향의 링케도 10.3%, 4.9%씩 득표했다.
총선 결과에 따라 연정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은 1위를 한 올라프 숄츠 사민당 총리 후보에게 돌아갔다. 사민당의 선전에는 ‘숄츠 효과’가 두드러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재 메르켈 내각의 부총리이자 재무장관인 숄츠는 풍부한 국정 경험과 정치 경륜을 자랑한다. 메르켈의 ‘실용주의’를 계승할 적임자로 같은 당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가 아닌 숄츠가 선택된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숄츠의 국정 경험 능력은 ‘메르켈 사민당 지지자’로 불리는 중도우파의 표심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며 “(숄츠가) 사민당 소속이지만 최저임금 같은 쟁점 현안을 (메르켈 내각에 이어) 합리적으로 다룰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됐다”고 논평했다. 투자자들은 극좌 성향의 링케가 연정에서 빠지게 되는 데 안도했다. 사민당의 승리로 좌파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안정감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선거 막판 메르켈 총리를 유세에 투입해 ‘메르켈 후광 효과’를 기대했던 기민·기사당은 고배를 마셨다. 기민·기사당의 득표율은 역대 최저치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총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현직 총리가 출마하지 않아 ‘현직 프리미엄’이 작용하지 않은 선거”라고 분석했다. 그만큼 여권에 불리했다는 것이다. 숄츠는 이날 “유권자들의 목소리는 매우 분명했다. 사민당·녹색당·자민당 연정에 힘을 실어준 만큼 연정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힘을 쏟겠다”며 기민·기사당을 겨냥했다.
하지만 기민·기사당에도 기회는 있다. 사민당이 연정 구성에 실패할 경우 주도권은 라셰트에게 넘어오기 때문이다. 실제 연정의 캐스팅보트로 떠오른 자민당은 기민·기사당 주도의 ‘자메이카’ 연정을 선호한다. 그래야 보수 중심의 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라셰트 역시 이날 “연정 협상에 모든 것을 쏟겠다”며 사민당과의 연정 각축전을 예고했다. 독일 공영방송 ARD는 “총선으로 두 명의 왕과 두 명의 킹메이커가 생겨났다”고 했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어느 당도 득표율이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난 1953년 이후 처음으로 3개 정당이 연립정부를 꾸려야 한다. 내년에 독일이 주요 7개국(G7) 모임의 의장국이 된다는 점, 코로나19로 위기 상황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리더십 공백은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차기 총리가 정해질 때까지 메르켈 총리가 임시로 총리직을 지키지만 국정 운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속에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하는 시점임을 감안하면 독일 리더십 부재는 국제 정세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에 맞서 유럽 동맹국들을 규합해야 하는 미국은 물론 유럽 내 독일 동맹국들 역시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독일의 연정 협상 결과를 주시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