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이사회와 준법감시위원회 등이 기존의 ‘거수기’ 역할을 거부하며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기업 총수나 최고경영자(CEO)의 일방적인 경영상 결정이 여과 없이 이사회에서 통과됐던 오랜 관행이 차단되는 것으로 그만큼 경영 투명성과 객관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본격화하고 있는 SK그룹은 계열사 이사회에서 경영진이 올린 안건을 부결했으며 삼성그룹은 준법위가 “지배구조 개선 활동에 들어가겠다”며 적극 개입 의사를 피력했다.
30일 SKC에 따르면 전날 열린 이사회에서 영국 배터리 음극재 업체 넥시온과의 합작법인 투자 안건이 이사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SKC는 “이번 안건과 관련해 이사회 재상정은 현재까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차세대 음극재 사업 진입을 계속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SKC는 오는 2025년까지 세계 1위 모빌리티 소재 회사로 성장하기 위해 넥시온 등 해외 기업과의 합작 투자를 추진했다.
이번 부결은 전체 이사회 7명 중 4명으로 구성된 사외이사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외이사들은 배터리 소재 부문을 강화한다는 비전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리스크 사항을 추가 검토하자는 취지로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이번 합작 투자건 역시 추가 보완을 거친 뒤 머지않아 다시 논의될 가능성이 점쳐진다.
과거에는 총수나 CEO와 친분 관계가 있는 저명 인사를 사외이사로 영입하고 주요 의사 결정 사항에 대해 반대 없이 ‘프리패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은 차단되는 것이다.
SKC의 한 관계자는 “투자 시기를 비롯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됐다”며 “매달 이사회에서 대여섯 건의 안건을 검토하는데 외부에 공개되지만 않을 뿐 종종 반려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SKC 사외이사는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과 배종서 화진데이크로 대표,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박시원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SKC는 이들 사외이사의 선임 배경에 대해 ‘소신 있는 의사 결정(박 원장)’ ‘풍부한 경험과 식견(배 대표)’ ‘회사와 이해관계가 없는 경제 전문가(이 전 실장)’ ‘ESG 가치 실현의 적임자(박 교수)’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이사회에서 실무 경영진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을 외부 전문가들이 객관적 시각으로 짚어내며 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해 7월 SK㈜ 이사회에서도 사외이사들의 주도로 이사회에 투자안을 올릴 때 보고를 간소화하는 내용을 담은 ‘이사회 및 위원회 규정 개정’ 안건이 부결됐다. 신속한 결정도 중요하지만 투자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사외이사들이 한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삼성 역시 준법위를 중심으로 투명 경영을 강화하고 있다. 계열사들의 준법 감시·통제 기능을 높이기 위해 외부 위원 6명과 내부 위원 1명으로 구성된 준법위는 이날 ‘2020년 연간 보고서’에서 삼성의 정도경영 실천과 사회적 신뢰 제고를 위한 활동 의지를 다졌다.
준법위는 “경영권 승계, 노동, 시민사회 소통 등 3대 의제의 후속 방안을 검토, 실행할 것”이라며 “삼성 관계사의 전담조직(TF)이 추진하는 외부 컨설팅 용역 결과를 검토해 삼성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앞으로 삼성 지배구조 개편 논의 과정에서 준법위의 역할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지형 준법위원장은 앞서 “삼성의 4세 승계 포기 이후 최대 숙제는 지배구조 개편”이라며 “준법위가 앞으로 이슈 파이팅해야 할 핵심 2차 과제”라고 설명했다.
삼성은 지난해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삼성생명 등 핵심 관계사들이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용역을 맡겼으며 올해 하반기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삼성 내부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5월 대국민 발표에서 자녀에게 경영을 승계하지 않겠다며 ‘4세 경영 승계 포기’ 의사를 밝힌 후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집단 지배 체제 등을 포함한 지배구조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삼성은 BCG 보고서가 나오는 대로 세부 검토를 마친 뒤 로드맵 마련 등 본격적인 지배구조 개편에 착수할 방침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현재 사업 지원(삼성전자), 금융 경쟁력 제고(삼성생명), 설계·조달·시공(EPC) 경쟁력 강화(삼성물산) 등 사업 부문별로 쪼개진 3개 TF를 하나로 묶어 ‘통합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방안이 검토 중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국내 기업들의 ESG 경영 행보에 속도가 붙으며 산업계 전반으로 합리적인 의사 결정 구조가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한주희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문성을 가진 사외이사들이 관리와 감독뿐 아니라 조언자로서 의사 결정에 활발히 참여하는 추세”라며 “외부의 시각을 전하는 통로 역할을 겸하며 기업의 전략 수립에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