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저항의 도구, 음모론의 시대

박태준 생활산업부장
합리적 의혹 기반한 끊임없는 질문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사실 밝혀내
깨어있는 음모론자 더 많아져야할때



무서운 상상을 해보자. 세계를 열광시킨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오직 상상과 창작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거다. 실제 서해안 어느 외딴섬에서 벼랑 끝에 몰린 참가자들이 456억 원의 상금을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을 벌이고 있다. 이를 각지의 억만장자들이 디스코드 N번 방의 그들처럼 은밀히 즐기며 광기 가득한 베팅에 열을 올린다. 웬 미친 소리냐고.


그럼 이런 의혹은 어떤가. 코로나19는 중국이 생화학 무기 중 하나로 개발한 것이다. 중국 우한의 바이러스연구소 실험실에서 무기화를 위해 유전자공학으로 조작한 바이러스가 예기치 않은 이유로 유출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미국과 유럽 등 열강은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백신 개발에 이미 착수했다. 팬데믹 1년 만에 백신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다. 미친 소리라고 하기엔 뭔가 그럴듯한가.


하나 더. 올해 초쯤 이런 루머가 돌았다는 가정이다. “7~8년 전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서 수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부동산 개발 사업이 시작됐어. 그런데 이 사업 지분이 7%밖에 없었던 민간 업자들이 얼마 전에 배당금으로만 4,000억 원을 챙겼대. 자산 관리를 맡았던 회사의 고문으로 전 대법관과 검찰총장·국회의원 등이 있었다지. 더 재밌는 건 이 회사에 월급 250만 원 받고 다녔던 야당 국회의원 아들이 6년 만에 퇴사하면서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았다는 거야. 알겠지만 당시 지자체장이었던 정치인은 지금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이고.”


필자는 음모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모론자들 역시 한심하다고 여겼다. 사회 부적응자들이 쏟아내는 확증 편향적인 상상의 산물로만 치부했던 탓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을 바꿔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그렇게 살아야 함을 사회학자 전상진 교수는 성남시 대장동 프로젝트가 시작될 무렵인 2014년에 쓴 책 ‘음모론의 시대’를 통해 거듭 당부한다. ‘왜 서민들은 고통을 겪을까. 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할까. 텅 비어버린 공공 영역은 답변은커녕 질문도 하지 않는다. 오직 상상의 해결책들이 고통과 곤경의 원인을 묻고 답한다. 그중 하나가 음모론이다.’ 치열한 질문으로 진실을 파헤쳐 그들의 음모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음모론의 역할이라고 그는 말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기득권자들의 음모가 넘쳐나는 세상을 살아왔다. 전 대통령이 그랬고, 전전 대통령도 그랬다. 꽁꽁 숨겼던 음모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질 무렵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새빨간 거짓말, 근거도 없는 음모론.” 하지만 합리적 의혹 속에 탄생한 음모론은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고, 그들은 결국 죗값을 치르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의 음모는 더욱 교활하고 은밀해질 것이다. 당장 세상에 던져진 의혹은 무수하다. “화천대유는 누구의 것인가” “고발 사주인가. 도대체 손바닥의 ‘王’자는 무엇인가” “실상은 집값을 띄우기 위한 부동산 정책이었나” “이생포, MZ세대의 좌절도 분열을 위한 음모인가” “계층 사다리를 치워버린 것은 누구였나”.


전 교수는 ‘현실과 기대의 괴리, 즉 ‘간극’이 음모론의 최고 무대’라고 설명한다. 코로나19 이후 하루 평균 1,000여 개의 자영업 매장이 폐업한다는 뉴스 뒤로 김만배의 ‘50억 원 클럽’ 명단이 오버랩된다.


무대가 훌륭한 만큼 탐사의 역량을 갖춘 깨어 있는 음모론자들이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이런 의혹들의 근거가 뭡니까. 중상모략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와 같은 식의 역공에도 대비해야 한다.


오징어게임 속 성기훈은 말한다.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 기댈 곳조차 사라진 소시민들이 이제는 믿지 못하고 의혹을 던지기 시작한다. 음모론은 저항의 도구다. 그렇게 온 국민이 음모론자가 돼야 하는 대한민국의 우울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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