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리서치·도쿄일렉트론(TEL) 등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제조 회사들이 K반도체 클러스터에 둥지를 틀고 있다.
반도체 수요 급증과 세계 반도체 패권 다툼 심화로 공급망 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고급 기술을 가진 해외 업체들이 한국을 대상으로 생산과 연구개발(R&D) 현지화 속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연 매출 10조 원이 넘는 미국 반도체 장비 제조 업체 램리서치는 최근 화성 발안 공단에 새로운 생산 공장 운영을 시작했다. 연면적 6,200㎡에 2개 동으로 구성된 이 공장은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제조사였던 AP시스템이 소유하고 있던 건물이었다.
램리서치는 회로를 깎아내는 식각 분야에서 뛰어난 장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경기도 오산과 용인에서 ‘램리서치매뉴팩춰링코리아’라는 생산 법인을 지난 2011년부터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법인은 주로 반도체 전(前) 공정에서 웨이퍼 위에 얇은 막을 쌓아 올리는 화학기상증착(CVD), 식각 모듈 및 장비를 생산했다. 2019년에는 이곳에서 5,000호기 모듈을 출하했다.
이번 공장 증설로 회사의 국내 생산량이 상당히 늘 것으로 보인다. 램리서치는 올 5월 정부의 ‘K반도체 전략’ 발표 당시 “국내 생산능력을 2배로 늘리겠다”고 전한 바 있다. 발안 공장 신규 운영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후속 조치로 해석된다. 4월에는 이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15개 업무 분야 신입·경력 직원 채용도 진행했다.
또 다른 세계적 반도체 장비 업체 일본 TEL의 새로운 시도도 포착된다. TEL은 국내 대형 고객사인 SK하이닉스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기존 확보하고 있던 발안 공장에 새로운 R&D 인프라를 구축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는 “TEL이 생산하는 반도체 장비 스펙을 SK하이닉스의 요구 사항에 맞춰 변형할 수 있는 공간으로 안다”며 “이곳에서 SK하이닉스로 납품할 장비에 대한 퀄(승인) 작업도 이뤄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도 이 작업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트랙 장비, 식각, CVD 등 전 공정 전반으로 뛰어난 장비 기술을 보유한 TEL 역시 최근 국내 반도체 제조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화 작업을 분주하게 진행해왔다. 지난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지근 거리에 아파트형 공장 형태의 평택기술지원센터(PTSC)를 새롭게 구축한 뒤 삼성전자의 최첨단 팹 구축·유지 작업을 측면 지원하고 있다.
극자외선(EUV) 노광 시스템을 세계에서 독자 공급하는 ASML도 국내 신규 트레이닝 센터와 제조 센터 구축을 위해 2,400억 원 투자를 결정했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 내 새로운 부지를 찾는 작업에 한창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반도체 장비 회사는 세계 반도체 제조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업체다. 반도체를 만드는 공장인 ‘팹’에는 8대 공정 기술뿐만 아니라 각 공정을 구현할 수 있는 고급 장비가 필요하다. 최첨단 전공정 장비 분야의 경우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TEL, ASML 등 세계 4대 장비 업체들이 독보적인 원천 기술과 노하우를 확보, 세계 장비 시장에서 50~60%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 사태 이후 국내 곳곳에서 공급 다변화를 위한 장비 내재화 작업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뛰어난 생산 기술을 확보한 해외 장비사 의존도를 낮추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따라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규모와 세계 시장에서의 존재감을 보고 생산·R&D 현지화를 시도하는 외산 업체의 행보는 상당히 긍정적인 신호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세계 시장 반도체 설비 투자 폭증으로 심화하는 장비 공급 부족 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되는 것은 물론 훗날 국내 반도체 생태계를 이끌 토종 반도체 인재 육성과 새로운 공급망 확보에도 상당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